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31/3/2026=하느님 중심의 삶, 성화의 여정 “주님의 종; 예수님”
2026.3.31.성주간 화요일
이사49,1-6 요한13,21ㄴ-33.36-38
하느님 중심의 삶, 성화의 여정
“주님의 종; 예수님”
“나만은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날로 더욱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71,4)
메마른 대지가 참 피곤해 보였는데 봄비가 내려 촉촉이 적시니 참 마음이 푸근합니다.
“AI로 더 바빠진다!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이 인간을 더 바쁘게 만든 것처럼, 인공지능(AI)도
모든 사람을 더 바쁘게 만들 것이다.
AI시대는 이미 열렸고, 이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AI시대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자연친화적 삶의 중요성도 날로 커질 것입니다.
파스카의 성주간과 더불어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수도원 주변의 파스카의 봄꽃들이
세상사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수도원 정원 바위판 위의 <바늬> 성모상 주변의 꽃들이 참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꽃을 각별히 사랑하고 돌보는, 나이와 무관하게 꽃같은 자매와 주고 받은 덕담이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늘 성모님 곁에 있으니 성모님을 닮아 꽃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자매님도 그래요. 축하드립니다!”
“신부님, 또 하루를 열어 주시네요.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늘 주님 곁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주님을 닮아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이요 이 주님의 종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입니다.
AI시대에 믿는 이들의 답은 <늘 주님 곁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성주간 월-수요일 까지 말씀의 배치도 절묘하고 은혜롭습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둘째 노래, 셋째 노래가 연이어 나오고 복음은 이사야 주님의 종에 관한 예언이
주님의 종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보여 줍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뿐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거울에 비추어 보듯 주님의 종의 노래를 통해 당대의 예수님을,
또 우리의 신원과 성소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께 불림 받은 모두가 경청할 것을 명령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
바로 이것이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신원이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주님을 따랐던 모든 성인들은 물론
오늘 우리의 신원이자 성소입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불림 받은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가 맞는 것입니다.
이래야 존재감있고 의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 예수님이나 우리의 성화 여정은 결코 순탄대로의 여정이 아니라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시련과
고난을 통과해 가야 할 장애물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미 수난이 시작된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최측근 제자들중 하나인 유다의 배신을 예감하신 예수님의 혼란스런 내면이 다음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유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배신자 유다는 별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의 착잡 혼란한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때는 밤이었다’라는 말마디가 충격스럽게 전달됩니다.
바야흐로 어둠이 힘을 떨치는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불길한 느낌입니다.
이어 업친데 덮친 격으로 수제자 베드로의 배반이 예고됩니다.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장담과 예수님의 예고로 오늘 복음은 대미를 장식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닮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통렬한 회개의 유무가 둘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베드로는 통렬한 회개로 거듭나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 갔지만, 유다는 회개의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주님을 떠나 결국 자결로 불행한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일시적 좌절감은 참으로 컸을 것이며 다음 주님의 종의 고백이 그대로
예수님의 심정을 반영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그러나 주님의 종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바로 우리가 닮아야 할 부분입니다.
새삼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큰 죄임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불림받은 성소의 신원을 상기하며 다시 힘차게 일어서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내 권리는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그분께서는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셨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를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대로 주님의 종,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제가 요즘 자주 고백하는 말마디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는 불암산을 바라볼 때, 또 하나는 수도원 하늘길을 걸을 때 고백입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꽃같은 주님, 늘 함께 계시니 이 행복에 산다!”
“임그리울 때
하늘 보고 하늘 기운 숨쉬며
하늘 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 되어
가슴펴고 자유로이 힘차게
나는 듯 걷는다
날마다 수도원 하늘길,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주님의 종 예수님께는 어둠은 잠정적 영광에의 과정일 뿐, 예수님의 영적 시선은 짙은 어둠의 구름넘어
빛나는 영광의 태양을 봅니다.
예수님의 어둠중에 터져 나오는 환희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주님의 종이자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대신 우리 자신을 넣어도 은혜롭습니다.
사순시기 절정의 성주간 이미 주님 부활의 영광을,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고백으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주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 중심의 <성화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진종일 내입은
당신 정의를 이야기하리이다.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그 도우심을.”(시편71,15).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