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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1/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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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스테파노 신부님 ==1/4/2026===[(자) 성주간 수요일]

  2026년 4월 1일 수요일 [(자) 성주간 수요일] [(자) Wednesday of Holy Week]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화답송 시편 69(68),8-10.21-22.31과 33-34(◎ 14ㄴㄷ 참조) ◎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 ○ 제 마음이 모욕으로 바수어져, 저는 절망에 빠졌나이다. 동정을 바랐건만 헛되었고, 위로해 줄 이도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저에게 먹으라 쓸개를 주고, 목마를 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나이다. ◎ ○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31/3/2026=하느님 중심의 삶, 성화의 여정 “주님의 종; 예수님”

  2026.3.31.성주간 화요일                                                             이사49,1-6 요한13,21ㄴ-33.36-38       하느님 중심의 삶, 성화의 여정 “주님의 종; 예수님”     “나만은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날로 더욱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71,4)   메마른 대지가 참 피곤해 보였는데 봄비가 내려 촉촉이 적시니 참 마음이 푸근합니다. “AI로 더 바빠진다!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이 인간을 더 바쁘게 만든 것처럼, 인공지능(AI)도 모든 사람을 더 바쁘게 만들 것이다. AI시대는 이미 열렸고, 이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AI시대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자연친화적 삶의 중요성도 날로 커질 것입니다.   파스카의 성주간과 더불어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수도원 주변의 파스카의 봄꽃들이 세상사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수도원 정원 바위판 위의 <바늬> 성모상 주변의 꽃들이 참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꽃을 각별히 사랑하고 돌보는, 나이와 무관하게 꽃같은 자매와 주고 받은 덕담이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늘 성모님 곁에 있으니 성모님을 닮아 꽃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자매님도 그래요. 축하드립니다!” “신부님, 또 하루를 열어 주시네요.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늘 주님 곁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주님을 닮아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이요 이 주님의 종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입니다. AI시대에...

김찬선 신부님 ===31/3/2026===그러나 이제는

  주님은 오늘 심란하십니다. 제일 먼저 유다가 배반하고 이어서 믿었던 베드로마저 배반할 것이며 요한을 제외하고 다른 사도들도 배반할 것이기에 심란하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수고가 헛수고가 된 것으로 인한 심란함과 그렇게 공을 쏟은 제자들이 여전히 세속적인 것으로 인한 심란함과 특히 당신을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운명에 대한 연민으로 심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주목하는 것은 요한복음을 포함하여 우리 복음서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심란해하시는 주님의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 주님의 신성을 감추시려는 마르코복음과 달리 신성을 적극 드러내는 것이 요한복음인데도 이 요한복음마저 주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더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아지신 주님의 사랑 말입니다.   우리의 자식 농사가 헛수고 되는 것처럼 주님도 제자들 농사가 헛수고가 되고, 우리의 자식들이 신앙에 더 열심하길 바라는데 그렇지 않아 걱정하는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도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때문에 걱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공통적으로 ‘주님의 종’과 주님께서 인간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서시는 모습도 보여주십니다. 곧 이사야서와 복음은 이렇게 그 반전을 묘사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자신을 보고 제자들을 보면 헛수고와 어둠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면모이고 주님께서도 지니신 어둠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런 면모 덕분에 주님도 이러셨구나 하며 우리의 헛수고와 실패에 대해서도 절망하지 않을 ...

양승국 라파엘 신부님 ===31/3/2026=== 수없이 배신을 거듭하더라도...

  수없이 배신을 거듭하더라도...   저는 수난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과 치유 활동이 셀 수 없이 거듭되는 당신 일생의 절정기, 가장 잘 나가던 공생활 기간에만 우리 인간에게 극진한 사랑과 특유의 측은지심을 발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던 수난의 때에도 우리를 향한 측은지심의 시선을 여전히 지니고 계시며, 그 시선을 인간에게 보내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갈 무렵 베드로는 예수님께 장엄하게 약속을 드립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대사제 관저로 압송된 직후 베드로 사도의 태도는 즉시 돌변합니다. 그나마 베드로는 수제자인지라 책임감을 느꼈던지, 멀찌기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날씨가 쌀쌀했던지라 베드로 사도는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이자도 저 예수라는 자와 함께 있었습니다.”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아니라고, 또 아니라고. 또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 부인하던 순간,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바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던 순간, 예수님께서는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째려보는 시선? 비웃는 시선? 분노로 가득 찬 시선? 아니었습니다.    그 시선은 여전히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시선이었습니다. 대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눈빛으로도 대화를 할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건네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많이 힘들지? 속도 많이 상하고. 그래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거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31/3/2026==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 것을 보면 인정받던 제자입니다. 그가 유감에 빠져 배신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이 없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 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에 따르는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용서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

오늘의 명언 31/3/2026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온함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지혜를 주소서(라인홀드 니부어).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자가 패배하는 것이다(장 파울). 아무도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만들 수 있다(제임스 R.셔먼).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 아우구스띠노 성인) ‘늦게 배우는 것이 전혀 배우지 않는 것보다 낫다.’ (고대 로마 작가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첫 모금의 과학은 우리를 무신론으로 이끌지만, 잔을 끝까지 비우면 그곳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베르네 하이젠베르크). 싸우지 않는 대화의 첫걸음은 상대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야마사키 히로미). 또 다른 목표를 세우거나 새로운 꿈을 꾸기에 절대 늦은 때란 없다(레스 브라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