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주님과의 만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6.13. 금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1195-1231) 기념일 열왕기 상19,9ㄱ.11-16 마태5,27-32   주님과의 만남 오늘 복음도 어제와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의 뿌리가 문제입니다.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우선입니다. 마음에서 생각과 말,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마음에서 순결한 생각, 순결한 말, 순결한 행동입니다. 하여 생각이나 말, 행동을 보면 마음이 환히 들어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5,28). 과연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자 몇이나 될런지요.   예수님은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면 빼어 던져버리고, 오른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잘라 버리라 하시는 데 그대로 한다하여 죄의 싹은 근절 되겠는지요. 모두 죄의 엄중함을 말씀하시는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마음을 정화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샘솟는 음욕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피정지도 중 강론 내용이 생각납니다.   '주님 주신 참 좋은 선물의 피정기간이었고 저도 수녀님들을 사랑했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수녀님들을 이성(異性)으로가 아닌 형제(兄弟)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 그랬습니다. 사랑의 고백, 희망의 고백입니다. 사실 수녀님들이 이제는 이성보다는 형제들로, 인간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같은 하느님을 찾는 주님의 형제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우로, 주님의 도반으로 보였습니다. 피곤하면 졸고, 아프면 힘들어하고,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똑같은 한계와 약함을 지닌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도 느꼈습니다.   미사의 성찬전례 중 예물 준비 기도도 생각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좋은 글 - 06/2014

행복은 물건의 많고 적음이나 가격의 높낮이에 있지 않아요. 우리 눈이 평범한 것을 얼마나 귀하게 볼 수 있느냐에 달렸지요(와타나베 가즈코). 넘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뿐. 이제 여러분 차례이다. 이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오프라 윈프리). 마음은 빈 상자와 같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 상자가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 상자가 된다(양광모).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티베트 속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찾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존 러벅). 처음부터 겁먹지 말자.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세상엔 참으로 많다. 첫걸음을 떼기 전에 앞으로 나갈 수 없고 뛰기 전엔 이길 수 없다. 너무 많이 뒤돌아보는 자는 크게 이루지 못한다(요한 폰 쉴러). 신체의 장애라 할지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한, 의지의 장애는 아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영혼을 맑게, 신체를 쾌적하게 유지하자(H. 하이네).

마음의 순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6.12.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열왕기 상18,41-46 마태5,20ㄴ-26   마음의 순수 얼마 전의 강렬한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봉쇄지역이 있어야 하고 이를 지켜야 한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내외적 울타리와 봉쇄지역이다. 이게 없으면,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마음의 순수도 불가능하다. 아, 그러니까 사막의 고요를 확보하기 위한 수도원의 전통적인 외적 봉쇄지역은 내적 봉쇄를 상징하는 구나. 내가 나름대로의 일과표 준수를, 기도시간, 밥시간의 준수를 강조한 것도 결국은 울타리를, 내적봉쇄지역을 잘 지키라는 말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이어 수십년 전에 읽은, 그러나 지금도 뇌리에 생생한 성철 큰 스님의 일화도 생각났습니다. 스님은 1955년 동안거부터 1963년 동안거까지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만 8년을 스스로 만든 철조망 울타리에 갇혀 수행에만 전념했습니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것은 반대쪽이네.- 성철스님이 파계사 성전암 주위에 철조망을 쳤을 때 시자와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스님께서는 성전암에 불공하러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으며 그 방법으로 암자 주위에 철조망을 치기로 한 것입니다.   하여 부산 서면 고철물 시장에서 철조망을 구입해 와서 암자 주변을 완전히 둘러막고 입구에는 문을 달고 안쪽에다 큼직한 자물쇠를 채웠고 그 울타리의 봉쇄지역에서 치열한 내적 담금질을 통해 마음의 순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스님의 맏상좌 천제스님이 당시를 회상하여 쓴 글의 일부 참조). 바로 이게 마음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내외적 울타리가, 봉쇄지역이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는 강렬한 상징적 일화입니다.   이런 나름대로의 내외적 울타리와 봉쇄지역이 없이는 결코...

제맛, 제빛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6.10.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열왕기 상17,7-18 마태5,13-16 제맛, 제빛 '맛이 갔다'는 말마디를 듣고 재미있어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음식뿐 아니라 사람을 빗대고도 하는 말입니다.   '음식은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자식은 맛이 가도 버릴수 없다' 아주 예전에 들은 어느 분의 탄식조의 말도 생각납니다.   음식만 맛이 가는 게 아니라 세월 흘러가면서 사람도 제맛이 갈 수 있고, 색깔만 퇴색하는게 세월 흘러가면서 사람도 퇴색하여 제빛을 잃어갈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삶의 제맛을, 제빛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아니 오히려 세월 흘러갈수록 삶도 깊어져 고유의 제맛을, 고유의 제빛을 내는 매력적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주님은 어제 진복팔단의 복음에 이어 오늘은 진복팔단을 구체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리쳐 주십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성인들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제맛을, 제빛을 내며 진복팔단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첫째, 세상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이미 소금과 빛에 앞서 세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선 구원도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소금과 빛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존재의미입니다. 음식을 맛있게, 부패하지 않게 하는 소금처럼, 세상을 맛있게, 부패하지 않게 해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처럼 세상을 밝히는 빛같은 우리의 삶입니다.   세상이 상징하는바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만이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공부해야 합니다. 뱀처럼 제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합...

참 행복한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6.9.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열왕17,1-6 마태5,1-12 참 행복한 삶 제가 여기에서 피정지도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수녀님들과 함께 성무일도와 미사를 바치는 시간입니다. 저나 수녀님들이나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행복으로 사는 '하느님의 사람'인 수도자입니다. 하여 수도자의 으뜸 의무는 하느님의 일인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수도형제들에게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말고,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어제 성령 강림 대축일의 아침 성무일도 시간, '주님을 찬미하라'는 다니엘 찬미가는 얼마나 흥겨웠고, 성령강림대축일 미사는 얼마나 장엄했는지요.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행복으로 사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의 표현이 바로 하느님 찬미이며 이게 우리의 본질적 성소입니다.   길었던 부활축제시기는 성령강림대축일인 어제로 끝나고 오늘 부터는 평범한 일상의 시작인 연중시기입니다.   6 월 예수성심의 늘 한결같은 초록빛 사랑을 살라고 사제의 제의 색깔 역시 초록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자유롭습니까? 여러분은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생생할 때 참 행복에 자유요, 내적부요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나라의 꿈이요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피정 중 만났던 수녀님들과의 대화 중 80년대 입회했던 분들의 공통적 특징은 입회한 후 1년 6개월 동안 지청원기 동안 여기서 살았던 시절의 행복에 대한 추억이었습니다.   모두가 기도와 일로 몹시도 힘들고 바빴지만 하느님 사랑만으로 마음 순수하고 단순했던, 참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했습니다. 오늘 아침성무일...

성령 충만한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6.8.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ㄷ-7.12-13 요한20,19-23   성령 충만한 삶 저는 수녀님들과 함께 피정하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수녀님들도 피정을 시작하면서 매일 아침 성무일도때 마다 성령 송가를 노래했고, 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지금 미사는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음을 체험하고 확인하며 또 성령을 충만히 받는 시간입니다. 저는 참으로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령님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바로 이 은혜로운 시기에 수녀님들의 피정지도를 맡았다는 것이며, 하나는 수녀님들의 피정 중에 제가 26년 동안 몸 담았던 요셉수도원을 지난 3.26일 떠난 후 어제 처음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은인 자녀의 혼인미사를 위한 수도원 방문이었지만, 원장직을 내려놓고 안식년을 위해 수도원을 떠난 후 이렇게 어제처럼 성령 충만한 분위기에서 힘차게 미사를 드려보기는 처음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다음 두 가지 깨달음도 순전히 성령의 선물이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입니다.   하나는 '요셉수도원'은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내 운명이자 사랑'이란 무한 책임에 대한 깨달음이었고, 수도원을 찾았을 때 '내면에서 솟구치는 새로운 힘'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만났을 때, 내면에서 샘솟는 그런 힘이었습니다. 하여 지난밤은 임을 만난 기쁨에 제대로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이 모두가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은 부활시기를 끝내는 부활시기의 절정인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좋은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오늘 강론은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6.6.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사도25,13ㄴ-21 요한21,15-19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순국열사들의 나라사랑을 기리는 현충일에 사랑에 대한 강론을 하게 된 점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은 봉헌입니다. 사랑은 순교입니다. 사랑은 관상입니다. 사랑은 아픔입니다.   아픔의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참 사랑에는 언제나 아픔이 따릅니다.   사 랑은 아름다움입니다. 아픔이 있어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랑의 봉헌자, 사랑의 순교자, 사랑의 관상가, 사랑에 아픈 자, 사랑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특히 우리 수도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사랑을 빼놓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사랑의 성인들입니다. 성인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여기 수녀원의 초석을 놓은, 오랫동안 원장직을 역임하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노 명숙 살레시아 수녀님 역시 사랑의 성인입니다.   어제 안내실 진열대에 있던 '노명숙 수녀의 아름다운 세상, 노명숙 살레시아 수녀 개인전'이란 제하의 화첩을 보면서 받은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1점의 '사계절'이란 제목이 붙은 풍경화는 수녀님의 자연을 통한 '관조의 사랑'의 표현이었고, 7점의 '사랑'이란 제목이 붙은 빨간 장미꽃 그림들은 수녀님의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님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수녀님은 전시회(2012,7.4-7.10)가 끝난 후 2012.8월 말쯤 귀천하셨습니다.   그러니 수녀님의 그림 전시회는 마지막 수녀님이 주님께 드린 사랑의 봉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강...

주님의 눈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6.목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675-754) 기념일 사도22,30;23,6-11 요한17,20-26 주님의 눈길 엊그제부터 시작하여 오늘로서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7장이 끝납니다. 엊그제 복음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어제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오늘은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 후 오늘 복음을 듣던 중 '아버지'란 말이 유난히 귀에 반복적으로 들어와 도대체 몇 번이나 나왔는가 방에 와 헤아려보니 무려 14회나 나왔습니다.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3일 동안 복음의 서두도 대동소이합니다. 화요일 첫 날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고 수요일과 오늘 목요일은 똑같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입니다.   새삼 얼마나 하늘을 많이 바라보며 기도하셨는지 예수님의 기도 습관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보다 하늘을 많이 보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는 하늘이 '아버지의 얼굴'로, '아버지의 눈'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여 예수님의 눈길은, 눈빛은 하늘 아버지를 닮아 한없이 그윽하고 깊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26년 동안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에 살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이 불암산 배경의 하늘일 것입니다.   예전에 써놓고 애송한 '하늘과 산'이란 시도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하늘이라면 예수님은 그대로 산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다. -하늘 있어/산이 좋고, 산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하고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