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0의 게시물 표시

이해(理解)라는 사다리

이해(理解)라는 사다리 매일 한 이불을 덮는 부부 사이는 물론 부모자식, 친구사이, 친척들, 형제, 이웃 직장 동료에 이르기까지 이쁜 사람보다 미운 사람이 더 많은 게 인생이다. 그런데 밉다는 것은 그 사람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을 미워하다 보면 결국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일 뿐. 그럴 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보자. 15층 정도의 높이만 올라가도 모두가 다 개미처럼 작아 보이고, 나도 모르게 연민이 생겨난다. 그래, 인생이 뭐라고 아웅다웅 살아야 한담 ! 다 그들도 이유가 있겠지,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거야 ~ 이해 = under + stand, 즉 상대방보다 낮은 곳에서 바라보면 타인을 이해하게 되고 인생이 환해진다. 마음 사다리를 타고 남보다 더 낮은 곳에 자신을 세워라.

보고 싶다는 말 - 이해인

보고 싶다는 말 - 이해인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을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 작은 위로 중에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 김수환 추기경

영국의 저명한 문필가이자 사상가인 버나드 쇼와 어느 정신박약자가 함께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배는 침몰하고 승객 중에 버나드 쇼와 정신박약자 두 사람이 남게 되었는데 구명대는 1인용 하나뿐이었습니다. 이때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 살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살아남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당사자라면 누가 살아남아야 하겠습니까? 판단은 버나드 쇼가 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대답이 어느 편이냐에 따라서 가치관이 정반대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답은 물론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버나드 쇼가 살아남아야 한다'와 '정신박약자가 살아 남아야한다'입니다. 먼저 버나드 쇼가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정신박약자는 무용지물이지만 버나드 쇼는 더 많은 작품으로 인류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버나드 쇼가 스스로 희생되고 정신박약자를 살려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그럼으로써 보여준 그 인간애는 버나드 쇼의 과거, 현재의 작품, 미래에 쓸 어떤 작품보다도 인류에 더 공헌할 수 있고 그 살신성인의 정신은 오늘의 이기적인 인간사회에 불멸의 빛이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치관 중에서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정직을 포기한 성공은 없다

정직을 포기한 성공은 없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짓고,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정직해야 한다." 정직이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한 것, 즉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미덕은 정직이다. 상대방의 말을 믿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자기가 한 말을 부인하는 풍토가 형성되면, 인간 관계는 그 시점부터 불신의 끈으로 묶이게 된다. 한 우산 회사에서 제작 과정 중 실수로 우산에 결함이 생기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회사는 이것을 바겐세일로 처분하기로 했으나 도무지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 광고회사가 이를 인수해서 판매를 시작했는데 우산은 날개 돋친 듯 삽시간에 팔렸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광고 회사는 이 상품을 팔기 위해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신문에 게재했다. "흠이 있는 우산을 싼값에 팝니다. 하지만 사용하기에는 불편이 없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던 것이다. 고객을 구름 때처럼 몰리게 한 힘은 바로 '정직' 이라는 무기이다. <옮긴 글>

칭찬하는 7가지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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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찬하는 7가지 비결   첫 째. 꼬집어 사실을 칭찬하라. 우리는 칭찬에 어색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런데 칭찬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중에서도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칭찬"을 하는 것이다. 없는 사실을 칭찬하거나 과잉 칭찬을 하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둘 째,   그 즉시에 칭찬하라! 시간이 지난 다음에 칭찬을 하면 그 효과는 반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있는 사실을 "그 즉시에 칭찬"을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일주일 전에 있었던 무엇은 어떠했다는 식의 칭찬은 이미 효과를 상실한 상태이다. 셋 째,   일반적인 것 말고 특정한 상황을 칭찬하라! "칭찬을 들어도 될 것인지 본인을 알고 있다." 만약에 당신 열심히 출근하니 멋쟁이다. 라고 칭찬하면 효과가 있겠는가? 넷 째, 여러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칭찬하라! 당사자에게만 칭찬을 하면 그 효과를 크게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칭찬할 일이 생기면 가능하면 여러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섯째,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갑돌 이는 이런 점이 부족한데 갑식이는 그러한 점에서 칭찬할 만하다. 라고 칭찬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히려 "당사자를 당황하게 하거나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된다. 여섯째,   칭찬 후에는 즉시에 보상하라! 말로만 하는 칭찬 누구는 못하나!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칭찬 후에는 즉시에 보상"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하다못해 악수를 하거나 아니면, 등이라도 두들겨 주라! 일곱째,   칭찬한 것을 기억하라! 만약에 칭찬을 받은 당사자에게 같은 일에 대하여 꾸지람을 할 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잘 하였는데 이번에는 실수를 할 것 같다는 식으로 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칭찬을 들은 사람을 받듯이 그것을 기억"한다 ☆ 좋은 글 중에서 ☆

* 세상을 보게 해주는 창문 **

* 세상을 보게 해주는 창문 **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승차권 하나 손에 쥐고 떠나는 기차여행 같은 것 아닐까요 출발하면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기차에 한 번 승차하면 절대 중도하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떠납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탄환과 같아서 앞으로만 갈 뿐 뒤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듯 인생이라는 기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다보면 강아지풀이 손 흔드는 들길도 있고 금빛 모래사장으로 눈부신 바다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얼굴엔 기쁨에 겨운 아름다운 미소가 번지겠지요. 하지만 이 기차는 그런 길 뿐 아니라 어둠으로 가득 찬 긴 터널을 지나갈 때도 있습니다. 허나 고통과 막막함이 느껴지는 곳을 지난다고 해서 우리의 손에 쥐어진 승차권을 내팽개쳐 버리거나 찢어버리면 안됩니다. 지금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목적지에도 채 도착하기 전에 승차권을 찢어 버리고 중도하차 하려는 인생만큼 어리석은 인생은 없습니다. - 좋은 글 중에서

아픈만큼 삶은 깊어지고

아픈만큼 삶은 깊어지고 흐르는 물이 고이면 썩어가듯 움직임이 정지되면 마음엔 잡초가 자라난다.   상처받기 두려워 마음 가두어 놓고 잡초 무성히 키울 바에야 차라리 어울리는 세상에서 속마음 열어 놓고 사는 것이 좋을듯 하다. 들어야 할 것 듣기 싫고 가지고 있는 것 버리기 싫지만 마음은 한 시간에 머물러도 한 곳에 갇혀 있어도 아니된다. 매서운 바람이 마음 한 구석에 소용돌이를 일으켜 드러난 상처에 생채기를 만든다 하여도 고통이 아픈만큼 줄 수 있는 자람이 있고 교훈이 있기에 마음은 편한 곳에 두어 움직임이 계속되게 해야한다. 물은 흐르기 싫어도 흘러야 하고 흐르는 물은 파도를 만들듯 마음은 추함이 있어도 열려야 하고 아픔이 있어도 흘러야한다. 마음의 고통은 공기처럼 소중하여 아픈만큼 삶은 깊어지고 자란만큼 삶이 풍성해지고 편안해진다   <옮긴 글>

세상의 최고의 것을 주라 / 마더 데레사

세상의 최고의 것을 주라 / 마더 데레사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아름답다’의 네 가지 얼굴(유영만, ‘청춘경영’ 중에서)

‘아름답다’의 네 가지 얼굴(유영만, ‘청춘경영’ 중에서)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정말 아름답구나’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첫째,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에서 나왔다고 한다. 앓는 동안 아픔의 상처가 흔적이 되고, 그 흔적은 시간과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진주조개의 아름다움은 조개의 속살에 생긴 상처를 메워 가면서 탄생된다고 한다. 상처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의 두 번째 어원은 한자 ‘美’에서 찾을 수 있다. ‘美’는 ‘양(羊)’자 밑에 큰 ‘대(大)’자가 붙은 글자다. 본디 ‘큰 양’을 뜻했으니 양의 모양과 성질에서 ‘아름답다’의 뜻이 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말은 ‘양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주인의 흐뭇한 마음’이라는 해석이다.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알다(知)’라는 동사 어간에 ‘음’이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아름다운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모름다움’이다. 네 번째, ‘포옹하다’를 의미하는 ‘안다’에 접미사 ‘음’을 붙어서 ‘안음’이라는 말이 생겼고, 이것이 다시 ‘아름다움’으로 변했다고 한다. 내가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과 정도를 아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4.24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9,31-42 요한6,60-69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어제 말씀의 주인공이 사도 바오로였다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단연코 사도 베드로입니다. 이 두 분 사도는 참 좋은 우리 신앙의 길잡이이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주님의 열두 제자를 향한 질문에 시몬 베드로의 답은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대답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로 정했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 없는 베드로나 바오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주 그리스도 예수님 없는 우리 역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갈 곳은 많은 것 같은 같은데 갈 곳은 없고 만날 사람은 많은 데 만날 사람은 없습니다. 유일하게 남는 분은, 찾아갈 분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 한분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마침 문병 차 병원에 가던 중 서점에 들렀습니다. 베스트셀러 중 법정 스님의 책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고 좋은 내용들이지만 그뿐, 뭔가 가장 중요한 중심이, 생명과 빛을 주시는 주님이 빠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 저의 개인적 관점일 것입니다.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단연코 말씀입니다. 아침성무일도 시편 중 ‘말씀’이란 단어가 들어 간 대목도 몇 구절 눈에 띄었습니다. ‘그 말씀을 보내시어 그들 낫게 하시고, 죽음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  ‘말씀 한 번 하시니 광풍이 일고’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서 이 내 눈은 밤새도록 떠 있나...

"행복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4.25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이민의 날) 사도13,14.43-52 요한 묵7,9.14ㄴ-17 요한10,27-30           "행복한 삶"       착한 목자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나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다인 랍비 여호슈아 헤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세상에 똑같은 얼굴 없듯이 똑같은 성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유일무이한 그만의 고유한 성소입니다. 다양한 성소들이 조화를 이룰 때 공동체도 하느님을 닮아 풍요롭고 충만하고 아름답습니다. 바로 이런 이웃 형제들의 성소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웃사랑이자 하느님 사랑입니다. 부르심에 충실할 때 충만한 존재에 행복한 삶입니다. 하여 저는 오늘 우리의 성소를 새로이 확인하는 ‘성소주일’에 덧붙여 ‘행복주일’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불러 주신 성소에 충실할 때 참 행복입니다. 오늘 행복주일에 주님은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가 될 때 저절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착한 목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이 착한 목자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시끄러운 목소리들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소음 공해 가득한 세상이라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참 힘듭니다. 무의미한 피상적인 소리들로 채워진 쓰레기통 마음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시끄러우면, 주님을 향하여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리 귀가 밝아도...

사랑이 숨 쉬도록 놓아주어라

사랑이 숨 쉬도록 놓아주어라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랑의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면을 경험한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의 삶은 활기를 띤다. 반면에 우리는 사랑의 깨지기 쉬운 속성도 알고 있다. 우리의 사랑은 소유욕, 질투, 오해와 뒤섞여 있다. 그리고 사랑은 어느날 갑자기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꼭 붙잡으려고 한다. 우리는 상대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 그리고 절대적인 사랑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그런 것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다. 이러한 지나친 기대는 상대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게 되고 수많은 결혼의 위기를 초래한다. 만약 초월의 차원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유한한 것에서 절대적인 것을 기대하고, 인간에게서 신적인 것을 기대하게 될 텐데, 이는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나의 모든 동경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사랑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모든 연인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사랑을 즐길 수 있다.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로부터 사랑을 강제로 끌어내지 않아도 된다. 이 사랑에 대해서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사랑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만 사실 이 사랑은 나에게 한계도 없고 조건도 없는 무한한 사랑을 암시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상대에게 그의 사랑이 유한하다고 비난하지 않고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에 감사할 따름이다.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한다면, 언제나 상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랑의 특징은  상대에게 매달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상대에게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이것이 상대를 점점 더 옥죄게 된다. 그러면 상대는 이 옥죄인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우리를 떠나려고 할 것이다. 떠나려는 상대를 붙잡기 위해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어 주려고 ...

<성소주일을 지내며>

4월 26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요한 10,1-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성소주일을 지내며>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제 성소여정을 돌아보니 참으로 큰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시는 착한목자로 앞서가셨는데, 나는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슬퍼졌습니다.    사제생활, 수도생활에 따르는 기쁨과 보람도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통과 십자가도 큽니다.    사람들은 사제들에게서 완벽한 인간상을 요구하지만, 사제도 인간인지라 부족함을 안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람들은 사제를 예수님 바라보듯이 바라보시지만 때로 사제도 흔들리고 방황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부끄러울 때도 있고 비참할 때도 있습니다. 죄 속에 빠져 허덕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매일 강론대에 서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선포해야 하고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해야 합니다. 정말 부담스런 일이지요.    사람들은 수도자들에게서 천사의 모습을 요구하지만, 수도자들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때로 즐기기도 해야 하고, 때로 중대한 과오도 범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동료사제께서 농담반 진담반 이런 말을 하더군요.    “본당사제로 보람도 크지만 때로 힘들 때도 많습니다. 신자들의 영성생활 증진을 위해 강론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참고도서까지 여러 권 봐가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성의 있게 준비해서 강론했더니, 신자들이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신부님은 뭔 잔소리가 저렇게 많은지?”    미안한 마음에 강론을 간단하게 했더니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신부님은 통 강론에 성의가 없으셔, 보아하니 강론준...

우아한 쉼표(정영, ‘지구 반대편 당신’ 중에서)

우아한 쉼표(정영, ‘지구 반대편 당신’ 중에서) 토요일 오후, 포트위스는 카우보이의 옷과 구두와 모자를 파는 집들, 그리고 옛날식 스테이크 하우스들이 가득했다. 아이든 노인이든, 행복한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을 입고 대충 집에서 뒹굴던 내가 떠올랐다. 어쨌든 그렇게 휴지처럼 던져져 있는 날들도 있다. 사실 그러고 나야 충전이 될 때가 있으니까. 영국의 월간지 <게으름뱅이>의 편집장 매튜는 말했다. “살면서 누리는 최고의 기쁨은 몸을 쭉 뻗고 누워 있을 때 맛볼 수 있어.” 그러자 또 다른 편집장 톰이 말했다. “배꼽을 재떨이로 쓰는 것도 살면서 누리는 큰 즐거움이야.” 그러자 또 다른 편집장 개빈이 말했다. “누운 채로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반사 프리즘 달린 안경이 생기면 정말 좋겠어.” 쉰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반성할 것은, 주말을 즐기는 법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피에르 쌍소는 말했다. “게으르다는 점은, 느즈러질 대로 느즈러져서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마치 극장에서 공연이 없는 날을 ‘공연 안 하는 날’이라고 하기보다 ‘공연 쉬는 날’이라고 하듯이, 우리는 저마다 사회라는 극장 또는 무대의 배우다. 우리도 때때로 휴식이, 다시 말해 쉬는 것이 필요하다.” 포트워스 사람들은 주말이면 인생에서의 자기 배역을 잠시 벗어놓는다. 항상 우아하게 걸어야 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우리 엄마도 얼른 이곳으로 달려와 게걸스럽게 웃었으면 좋겠다. 병원도 약도 다 끊고.

마더 데레사의 다섯 손가락 복음

“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 요한 10:9) 한 소녀가 아버지의 유품 중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발견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되찾지 못하여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겪으셨지만 그 고통을 아무리 애써 떠올려도 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의 연약한 몸을 가져가시고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저는 당신의 도움을 받아 저희 병자들이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에 당신께 매달리기만 하면 아무런 위험이 닥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소서. ” 오래 전에 마더 데레사가 유엔( UN) 을 방문했을 때 한 외교관이 다가와 말했다. “수녀님, 저는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녀의 앙상한 다섯 손가락을 펴서 다른 손에 올려 놓고 말했다. “기도하실 때에는 당신이 받은 수많은 은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주님께서 바로 나에게 해주신 것(You did it for me)’을 생각하십시오.” 그러자 그 외교관은 손을 불끈 쥐어 높이 쳐들고는 “주님께서 바로 나에게 해주신 것”이라고 말하면서 돌아 갔다. 마더 데레사가 항상 묵상하며 실천했던 유명한 구절은 “주님께서 바로 나에게 해주신 것(You did it for me)”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것(Something beautiful for god)”이었다. 특히 다섯 손가락을 꼽아보면서 복음을 많이 전했다. ①내가 진실로 ②너희에게 이르노니 ③너희가 여기 ④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⑤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니라. ( 마태 25:40)   이 말을 되새기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운 사람을 만지고 씻어주고 섬길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