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1/1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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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모세 신부님 = ==1/11/2025==[(백) 모든 성인 대축일]

  2025년 11월 1일 토요일 [(백) 모든 성인 대축일] [(백) Solemnity of All Saints] 오늘 전례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린다. 이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어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5월 13일이었는데, 9세기 중엽에 11월 1일로 바뀌었다. 교회는 이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깨우쳐 준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들은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며 영원한 행복을 누립니다. 하늘 나라의 성인들을 기리며 전구를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는 우리도, 희망을 안고 성인들처럼 하느님을 뵐 그날까지 열심히 살아갑시다.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7,2-4.9-14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31/10/2025==루카 14,1-6: 안식일에 대한 논쟁

  연중 제 30 주간 금요일 복음 :  루카  14,1-6:  안식일에 대한 논쟁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보여 주신 참된 자비와 사랑을 통해 ,  율법의 본래 정신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한다 .  바리사이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초대했지만 ,  주님은 오히려 그 자리를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를 가르치는 장으로 바꾸신다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수종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  주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물으신다 .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  합당하지 않으냐 ? ” (3 절 )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주님은 단순히 율법을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  율법의 참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  안식일은 단순한 규율이 아니라 ,  인간을 위해 주신 자유와 구원의 날이며 ,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드리는 날이다 ( 신명  5,14-15;  이사  58,13).   주님께서는 또한 질문하신다 .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 ” (5 절 )  이는 안식일이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날임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  하느님은 사랑이 멈추는 분이 아니시며 ,  인간을 위해 계명을 주셨다 .  따라서 안식일을 문자적·법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그 본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본문을 해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주님은 안식일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  그 참뜻을 밝히러 오셨다 .  인간을 위하여 주신 날에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  율법의 의미를 완전히 잃게 된다 . ” ( 루카 복음 강해  47,2)  성 아우구스티노는 덧붙인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31/10/2025===진리와 사랑은, 예수님은 판단의 잣대 “참 자유로운 삶”

  2025.10.31.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로마9,1-5. 루카14,1-6     진리와 사랑은, 예수님은 판단의 잣대 “참 자유로운 삶”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스럽습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워낙 훌륭하고 탁월하기에 후임 교황에 대한 염려가 컸었는데 기우임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기상하면 교황 홈페이지를 대략 확인하는데 레오 교황 역시 강론을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 못지 않게 깊고 풍부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가톨릭교회를 위한 배려가 완벽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레오 교황께서 학생들에게 한 강론중 한마디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교육은 세상을 바꿀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도구들중 하나다. 기술이 너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라.”   “기술이 너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라(Do not let technology use you)”는 말마디를 즉시 바꿔봤습니다. “진리가, 사랑이 너희를 이용하도록 하라(Do let truth or love use you)”, 얼마나 멋집니까? 진리이자 사랑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다음처럼 바꿀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이용하도록 하라(Do let Jesus use you)”.   진리와 사랑은, 예수님은 판단의 잣대가 됨을 깨닫습니다. 진리와 사랑의 도구가, 예수님의 도구가 되는 삶이 교육의 목적이요 이런 삶은 정말 바람직한 삶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입...

양승국 신부님 ===31/10/2025===== 연민의 마음과 연대의식!

  연민의 마음과 연대의식!   나이를 슬슬 먹어가면서 이런저런 병에 노출되고 제반 기능이 약화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병이 한 인간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동시에 병은 또 얼마나 우리를 성찰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고마운 그 무엇인지?   수종(水腫) 증세는 한 마디로 퉁퉁 붓는 증세입니다. 뱃속에 물이 가득 차서 심장, 신장, 간 등을 압박하다 보니 얼굴이며 온몸이 붓는 증세입니다. 수종은 질병이라기보다 하나의 증상으로, 신체의 세포조직에 체액이 비정상적으로 유출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수종 환자는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데 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말라 증세가 심해집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병리학적 이해가 없었기에 수종병을 ‘돈에 목숨거는 욕심 많은 사람’을 표현할 때 썼다고 합니다. 계속 물을 마셔도 달랠 수 없는 갈증과 주머니가 두둑하면서도 더 많은 재물 축적에 혈안이 된 모습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수종은 지금도 치료가 어려운데, 예수님 시대,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불치병이었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환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으로 충만하셨던 예수님께서 그의 오랜 고통, 무엇보다도 특이한 이상 증세,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그래서 계속 마시다 보니 배가 올챙이 배처럼 볼록한 그의 측은한 모습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고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3)   거두절미하고 단칼에 그들이 품고 있는 사악한 마음에 도전장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

빠다킹 신부님 ===31/10/2025==인간적인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입니다.

  2025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10미터를 똑바로 걷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 감고 걸어야 한다면 어떨까요? 두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여기서 눈을 뜨는 순간, 그 거리는 달라집니다. 실제로는 너무 짧은 거리이고, 감았을 때 어기적거리며 천천히 걷던 때와 달리 빠르게 뛸 수도 있습니다.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는 예입니다. 주님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도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주님을 삶 안에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앞을 가리고 세상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불확실성에서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삶 안에서 느끼는 사람은 힘차게 이 세상을 삽니다. 주님께서 든든한 ‘빽’이 되시기에 삶 안에서 뛰어갈 수도 있게 됩니다.   이를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주님과 함께하면서 집중하는 삶, 그리고 이 삶을 평소에도 살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이라고 외친다면,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내 옆에 계시지 않는다고, 그래서 아무런 응답이 없는 분이라면서 울부짖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기에, 조금만 집중하고 함께하려고 노력한다면 삶 안에서 충분히 느끼고 또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당연히 자기 삶의 밀도를 달라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대해 논쟁합니다. 마침, 주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종은 몸이 붓는 병으로, 당시에는 불치병에 가까웠으며 율법적으로는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고치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의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3)   병자의 치유를 하나의 노동으로 보고 있었던 ...

이해인 수녀님의 낙엽

  이해인 수녀님의 <낙엽>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이 영근 신부님 ====31/10/2025====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   낙엽이 하늘에서 내려와 발길에 밟힙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낙엽>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시게 되었는데,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분 앞에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루카 14,1). 이는 마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실 이전에도 ‘손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루카 6,6-11)과 ‘허리 굽은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루카 13,10-17)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을 올가미에 걸어 체포하려고 결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루카 14,3) 그런데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루카 14,4). 왜냐하면 이 치유를 인정하면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

함 승수 신부님==31/10/2025===루카 14,1-6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루카 14,1-6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수종병(水腫病)은 신체 특정 부위에 물이 차서 몸이 붓는 질환입니다. 그로 인해 환자는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실수록 목이 더 마르고 증세가 심해진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수종병에 걸리면 가망이 없었습니다. 몸 여기저기가 엄청나게 부어오르는데 마땅한 치료제도, 회복 되리라는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신 양떼가 겪는 고통을 곧 당신의 고통으로 여기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이시니 그런 큰 고통을 겪는 병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실 수 없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도, 그 자리에 당신을 제거할 구실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바리사이’들이 득실거린다는 것도 그분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그 병자에게 손을 대시어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후 집으로 돌려보내셨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는 보지 못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만 보았습니다. 시력이 안좋아서가 아니라 그들 마음 속에 사랑과 자비가 없었기에,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 즉 치료행위를 하여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분을 비난하고 단죄하게 되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구속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 나은 삶을, 당신 뜻에 맞는 올바른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한 뒤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 다른 이들, 특히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을 억압하고 단죄하는 건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율법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31/10/2025===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중남부 사제 회의가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캔자스, 세인트루이스, 투산, 콜로라도 스프링스와 덴버, 휴스턴, 샌 안토니오, 포트워스, 달라스, 오스틴, 피닉스에서 오셨고, 북미주 평화신문과 멕시코 시티에서도 오셨습니다. 교구가 달라도, 사는 지역이 달라도, 한국에서 서로 만난 적이 없어도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강물이 흘러 바다로 모이듯, 모두가 사제 서품을 받았고,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의 곁에는 언제나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곁에 여인들이 도움을 주었듯이, 이번 회의에는 샌 안토니오와 휴스턴 교우들이 봉사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있어서 회의가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듯이, 사제는 교우들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수고하는 캔자스의 총무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회의 중 나눈 이야기 가운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한 분은 언어가 달라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셨다고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도 여전히 봉사를 이어가던 자매님의 얼굴은 날개 없는 천사와 같았습니다. 또 멕시코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정 방문을 하다가 만난 열한 살 소녀 미리암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습니다. 수녀님은 당연히 알 거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부탁해 50명의 아이에게 우유와 빵을 마련해 주셨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사랑...

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31/10/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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