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좋은 글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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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인터넷을 하다가 발견한 글과 그림.. 마음에 와 닿아서 올려봅니다.

이상적 공동체 삶의 원리 -자유, 평등, 정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8.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1,10.16-20 마태23,1-12 . . 이상적 공동체 삶의 원리 -자유, 평등, 정의- . 혼자서는 살 수도 없거니와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싫든 좋든 공동생활은 지상명령입니다. 한자의 둘이 떠받치고 있는 사람 '인(人)' 자가 최소한도 두 사람의 공동체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 하나와 둘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작년 가을 소풍 때 홍천의 산골짜기 궁벽한 수녀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절감한 사실입니다. 두 수녀님이 안팎으로 이루신 일이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둘이니 가능했지 혼자라면 꿈도 못꿨을 것입니다. . 공동체의 신비요 공동체의 예술입니다. 세상 대부분이 신비이지만 공동체의 신비를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이며, 세상 무슨 예술이든 공동체의 예술을 능가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유토피아 공동체를 향해 성장하고 변신해 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은 말씀을 중심으로 이상적 공동체의 원리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 1독서나 복음의 말씀은 주로 지도자들에 대한 충고이지만 공동체의 성원들 모두가 명심해야 할 공동체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 1독서 서두의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 바로 이렇게 지도자와 공동체의 성원이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이상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첫째 필수 조건입니다. . 주님의 말씀은 생명과 빛을 주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서로 마음이 맞아, 취향이나 성향이 같아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의 방향이 같아야 일치입니다. 공동체 성원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이신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기에 공동체의 일치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입니다. 바로 자유, 평등, 정의가 실현된 사랑의 공동체요 이게 바로 이상적 ...

원하는 것을 말하라(앤디 코프, 앤디 휘태커, ‘자체 발광의 기술’ 중에서)

원하는 것을 말하라(앤디 코프, 앤디 휘태커, ‘자체 발광의 기술’ 중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피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 끌어당기는 이유는 부정문을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끊임없이 말한다.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 “살이 안 쪘으면 좋겠어.” 말을 몇 마리 가진 이웃이 있었는데 하필 그가 말을 풀어 놓는 곳에 학교 버스가 정차해 학생들이 말들에게 과자를 주곤 했다. 말들은 초코바나 감자 칩을 매우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자 말들은 눈에 띄게 살이 쪘다. 보다 못한 주인은 “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라고 쓴 표지판을 세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먹을 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표지판 문구를 바꿨다. ‘제발, 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라고 썼다.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행사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긍정 심리학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것을 알던 그는 나에게 문제를 털어놓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까요?” 나는 웃으면서 종이에 몇 마디를 적어 건넸다. 그는 종이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요! 정말 이걸로 문제가 해결될까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며칠 뒤 문제는 해결되었다. 말들은 평상시의 체중으로 돌아왔고 털에도 윤기가 흘렀다. 그의 목장 앞을 지나가면 이렇게 쓰인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사과와 당근만 먹어요.” 단순하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다.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이루어지길 바라는 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효과가 있다. 좋은 내용이어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단순하면서 긍정적인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평생과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7.사순 제2주간 월요일 다니9,4ㄴ-10 루카6,36-38 . . . 평생과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 주님 말씀은 매일매일이 새롭습니다. 매일 미사 말씀의 은총이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루를 살게 합니다. .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우리 삶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하나뿐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말씀이 모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이란 말씀으로 수렴됩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이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 우리의 하느님은 추상적 절대자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시며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이런 아버지를 닮아갈 때 저절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수행도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오늘 주님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구체적 수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부정적 어투의 말씀이 둘이고 긍정적 어투의 말씀이 둘입니다. .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말씀입니다만 실천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단적으로 남을 심판하지 않는 이가, 단죄하지 않는 이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도 인간관계에서 남을 판단하는 데 있음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정말 남 말 안하는 것이, 남 판단하지 않는 것이 덕이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 사실 자기를 몰라 남을 판단하지 자기한계와 부족을 아는 겸손한 이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넑고 깊은 마음의...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들 -신비, 말씀, 복-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6 사순 제2주일 창세12,1-4ㄱ 2티모1,8ㄴ-10 마태17,1-9 . .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들 -신비, 말씀, 복- . 인스턴트 시대, 소모품 시대입니다. 급기야는 사람도 인스탄트가, 소모품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 얼마 전 오래 된 노트북을 새 것으로 바꿀 때 버려지는 옛 노트북을 보면서 오래되면 노트북만 아니라 사람도 쓸모가 없으면 소모품처럼 취급될 수 있겠구나 하는 섬찟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래서 스펙을 쌓으며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키기에 전력을 다하는 현대인들입니다. 장년, 노년은 물론이고 젊은 이들조차 소모품처럼 되어가는 잉여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출산율이 낮다고 걱정하지만 일자리의 부족으로 날로 늘어가는 잉여의 사람들이요 날로 초라해지는 사람들입니다. . 얼마전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서툰 컴퓨터 솜씨로 강론을 거의 완성했다가 잘 못 누른 까닭에 순식간에 원고가 흔적 없이 날라갔습니다. 저장해두지 않았기에 도저히 복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순간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참 위태한 디지털 문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아, 하느님 앞에 이렇게 우리도 저장 되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겠고 이게 심판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못마땅한 인간관계라면 이렇게 깨끗이 지울 수 있는 사람도 될 수 있겠구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 요즘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정말 깨어살지 않으면 문명의 이기도 사람을 망가트리는 사탄이 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 문명의 거부가 아니라 지혜로운 활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 존엄한 품위의 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발견된 세 열쇠말(키워드), 신비, 말씀,...

좋은 글들 - 03/2014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둘러싼 수만 개의 상처에 더욱 유연해질 수 있는 방법은 나도 그렇듯 누군가도 그럴 거라는, 단순한 사실을 아는 것이다(김신회). 타인의 결점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르나르) 우리는 단 1분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서둘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기쁨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적이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엇이든 가능한 한 많이, 빨리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서 생기는 것은 언제나 많은 만족과 적은 기쁨이다(헤르만 헤세). 세상의 모든 행복을 소유할지라도 그것을 선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없다.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으면 그는 기쁨을 느낀다(다비드 슈타인들). 미지의 것을 발견한 것만이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똑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것도 훌륭한 삶의 재발견이다(구본형).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니체).

사랑의 길 - 사랑의 수행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5. 사순 제1주갖 토요일 신명26,19 마태5,43-48 . . 사랑의 길 - 사랑의 수행 - .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사랑의 길' 하나뿐입니다. 사랑은 삶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있어 충만한 삶이요 사랑빠져 허무한 삶입니다. .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이요 만병의 근원은 사랑결핍에서 기인합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은 도전과 모험의 용기요 힘입니다. 사랑은 실천의 동사입니다. 하여 사랑의 수행입니다. . 외적 신체성장이나 경제성장은 곧 한계에 이르지만 사랑의 내적성장은 하느님께 이를 때까지 끝이 없이 진행됩니다. 사랑의 내적성장, 바로 이게 우리가 긍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 진정 사람을 감동시켜 내적성장에 이르게 하는 것은 사랑의 체험뿐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 요즘 제 기쁨 중의 하나는 수도원을 상징하는 문장의 스티커를 붙여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작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 참 마음에 드는 단순한(slmple) 문장입니다. 하늘을 배경한 불암산이요 하늘에는 십자가와 성체가 그리스도의 희망의 별, 태양처럼 온누리를 비춥니다. 불암산 안 배나무는 흡사 하늘 향해 양팔벌려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양팔을 상징하는 배나무 가지 사이에는 다섯 개의 배꽃 송이들이 오대륙을 향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니 그대로 존재론적 선교를 상징합니다. . "핸드폰을 주십시오.“ . 다짜코자 면담고해성사를 청하는 모두의 핸드폰에 이 스티카를 붙여주고 처방전의 종이에도 작고 예쁜 문장 스티커를 붙여주면 모두가 아이처럼 환한 얼굴이 됩니다. 이 스티카를 붙여주고 싶어 아랫집 수녀원에도 수년만에 방문했고 얼마 전에는 단체피정 온 30여명의 청...

역시 회개가 답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4.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에제18,21-28 마태5,20ㄴ-26 . . 역시 회개가 답이다 . 오늘 강론은 '역시 회개가 답이다' 라는 묵상 나눔입니다. 인생광야여정을 압축하는 사순시기는 회개의 여정이자 회개의 시기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개인주의적 이기적 삶에서 형제애의 공동체적 삶으로, 과거와 미래에서 현재의 지금 여기 하느님 제자리에로의 귀환이 회개입니다. . 전통단절의 시대, 공동체 붕괴의 시대, 약육강식, 승자독점의 자본주의 시대, 날로 기계화, 시스템화 되어가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하느님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개는 절박합니다. 끊임없는 회개 없이는 자기를 잃어, 영혼을 잃어 괴물이, 악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 보시기에 대죄는 딱 둘입니다. 절망과 이웃에 대한 무시와 멸시입니다. '넘어지는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게 죄이다.' 제 지론일뿐 아니라 주님의 뜻도 그러합니다. . 실수나 잘못으로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이나 자포자기로 곧장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다보면 영적탄력도 떨어져 온갖 질병에 급기야는 자살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제가 즐겨 써드리는 고해성사 때 보속 처방전 말씀의 약입니다. '지난간 일을 생가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 과거에 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말고, 과거는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고 현재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지금 여기서의 삶입니다. . ...

아무리 잃고싶어도 잃을수 없는것 - 『대자대비하신 하느님』中

아무리 잃고싶어도 잃을수 없는것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루가 15, 16>   아버지 집을 떠난 후로 계속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작은아들은 이제 인간성마저 상실하게 되는 시궁창에 처박히게 된다. 먹을것이 없어 돼지먹이로라도 배를 채우려 하면서 짐승의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자가 갖 게 되는 마지막 추락은 인간성의 상실이다. 작은아들은 돼지먹이라도 먹으려 하지만 그나마 주는 이도 없다. 돼지먹이마저 없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데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생명의 뿌리인 하느님 아버지를 떠날 때 겪게 될 비참함이 어떨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모든 것을 잃었다. 돈도, 친구도, 자신의 신원도, 나아가 인간이란 정체성도.   하지만 잃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아무리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서 아들을 기다린다.   아버지의 이 사랑만은 작은아들이 아무리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그에게 이 사랑은  마지막 희망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마지막 희망을  알려주고자 하신다. 왜 마지막 희망이라고 하는가?   우리에게 돈 한푼이라도 남아 있는 한 하느님 아버지께  얼굴을 돌려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도  기댈 곳이...

회개의 여정 -회개의 일상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2.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3,1-10 루카11,29-32 . . 회개의 여정 -회개의 일상화- . 회개의 여정, 회개의 표징입니다. 우리 평생 삶은 회개의 여정이요 눈 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로마에서 전례학을 공부하고 돌아 온 우리 형제가 주로 연구한 주제는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전례, 영성, 성서 등 그리스도교의 모든 분야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 주제가 바로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 신비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사람, 자연, 생명, 믿음, 사랑 등 세상에 신비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 모두가 신비입니다. 이 모든 신비의 원천이 하느님이요, 신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제자리로 돌아가 신비감각을 회복할 때 비로소 겸손이요 깊이의 사람입니다. . 얼마 전에 접한 '제대로 걸어야 제대로 산다'라는 책 제목과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바로 회개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자리와 제정신을 잃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지요. . 다음 주님 말씀이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배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루카11,29-30). . 예나 이제나 믿음 없는 악한 세대들입니다. 믿음 없는 악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니네배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에 회개했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회개로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1독서에서 보다시피 네네배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가 장관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

하느님 말씀의 위력 -주님의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1.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사55,10-11 마태6,7-15 . . 하느님 말씀의 위력 -주님의 기도- . 하느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자아초월도 이뤄지고 평화와 기쁨, 위로와 치유도 받습니다. 끊임없는 말씀의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바로 이사야가 말씀의 은총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말씀이 짧고 은혜로와 1독서 전부를 인용합니다. .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한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한다.“(이사55,10-11). . 바로 이게 하느님 말씀의 은혜요 위력입니다.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일하시며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 말씀 중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기도의 노하우를 통째로 우리에게 전수해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이자 동시에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 주님의 기도를 끊임없이 바칠 때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 주님은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하십니다. 군더더기 말을 붙이지 말라하십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담고 있습니다. 기도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

최후 심판의 잣대는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10.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19,1-2.11-18 마태25,31-46 . . 최후 심판의 잣대는 사랑 . 거룩함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막연한 거룩함이 아니라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거룩함입니다. . 오늘 1독서 레위기 서두, 주님의 명령이 엄중합니다. .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참 높은 품위와 존엄의 사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기대 수준이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모두 당신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이자 의무임을 깨닫습니다. . 마지막 최후 심판의 잣대도 바로 이 거룩함이 될 것입니다. 거룩함은 사랑입니다. 사랑 많은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이어 주님은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 사항에 대해 줄줄이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도둑질 해서는 안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 이처럼 계속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바로 이게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이요 이를 거스를 때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 아 얼마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를 짓는 지요. 계속 하여 '안 된다.'라는 부정적 말씀 뒤에는 확실하게 도장 찍듯이 '나는 주님이다.' 말씀하십니다. . '안 된다'라는 부정적 말씀에 이어 주목되는 두 긍정적 명...

광야, 유혹, 말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4.3.9. 사순 제1주일 창세2,7-9;3,1-7 로마5,12-19 마태4,1-11 . . 광야, 유혹, 말씀 . 디지털 시대입니다. 자연은 점차 사라지고 인위가 위세를 떨치는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 인위의 디지털 시대일수록 유혹은 많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다양한 중독현상일 것입니다. 자연을 떠난 업보입니다. . 특히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흔한 중독은 스마트폰일 것입니다. 도저히 스마트폰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젊은 이들 같습니다. 전철을 타고 다니다보면 온통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흡사 생각 없는 사람들, 영혼 없는 사람들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 극단적 사고는 금물입니다. 인위와 자연, 디지털과 아날로고의 조화가 필수입니다. 깨어 사는 영성훈련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비법을 소개합니다. . . 첫째, 광야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광야입니다. 광야여정의 인생을 살아가는우리들입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광야인생여정을 압축합니다. . 옛 구도자들은 하느님을 찾아 광야의 사막을 찾았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우러 광야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바로 여기 광야가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워야 하는 곳입니다. . 사막을 사막으로 받아 들일 때 바로 거기가 낙원입니다. 지금 여기의 광야를 떠나선 구원도 없습니다. 흔히 수도원의 앞문은 세상에 열려있고 뒷문은 광야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하는 데 수도원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영적 진리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광야에서 정화되고 단단해지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예수님은 공생활에 앞서 본격적인 광야체험을 합니다. 마치 우리의 사순시기를 압축한 듯 합니다. 주님은 광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