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1의 게시물 표시

'존재중심' 의 삶

아이들을 참 풍요롭고 밝게 키워 낸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남편을 잃고 혼자되어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정도로가난하였지만 아이들은 매우 밝았으며 그늘진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공공버스를 탈 때마다"이건 우리 차야.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거란다."하고 말했고 산과 들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마련해 주셨단다. 우리는 얼마나 부자인지 모른단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비록 물질적으로 빈곤했지만 늘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면서 아이들에게 척박한 세상에서도 늘 선한 의지를 갖도록 해주고 세상을 풍요롭게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물질적 소유가 최고가치가 된 이 시대에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어머니를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정이 결핍을 가지고 있지만 어머니가 하느님 안에서 믿음과 희망을 심어 준이런 아이들은 세상의 어떤 풍파가 닥쳐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빈곤 속에서도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 줄 알고 반대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가난한 마음을 가질 줄 알 것입니다. 삶의 깊은 곳에 흐르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늘 깨닫고 살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생존 양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지요. 그는 재산이나 지식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며 자기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 중심' 의 삶과 나눔과 베풂을 삶의 가치로 여기며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중심' 의 삶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소유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자체가 자신의 존재가 됩니다. 이런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늘 두려워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이해관계로 보기 때문에 방어적이며 가혹해지고 결국 스스로 외로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중심' 의 삶은 베푸는 삶 더불어 사는 삶 곧 너와 나 모든 존재를 하나로 만듭니다. 참된 행복은 자기가 가진 것에서 나...

인생의 멍에 /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주님, 또 한 분의 교우를 주님께 보내 드립니다. 이 사람이 살아온 시간 동안 지은 죄는 묻지 마시고 그가 살아 내야 했던 삶의 멍에만 생각해 주십시오. 설령 그가 주님께 충실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운명처럼 부여된 삶의 멍에를 한평생 지고 살아 냈다는 그것만으로 그는 아름답고 위대해 보입니다. 주님, 저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본당에서 장례 미사를 드리고 고인과 장례 행렬이 성당 문을 빠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바치는 저의 기도입니다. 장례 때마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는 생각할 것 없이 한 사람의 영혼을 주님께 보내는 순간은 그가 살아온 일생이 그저 장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해서 ‘잘 살았다’ 또는 ‘못 살았다’ 할 때, 주님 앞에서 그 차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판단과 평가일 따름이지요. 주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자녀가 비록 이승에서 못난 삶을 살고 돌아왔다고 해서 주님께서 당신 자녀에게 분노하시고 섭섭해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 눈에는 그가 살아왔던 그 모든 이야기가, 설령 우리 눈에는 온통 죄스러운 삶일지라도, 주님께서는 한계와 약함을 가지고 최선을 살았던 그의 장한 모습만을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도, 우리 자신도, 주님의 마음이 되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투성이처럼 보이는 사람도 그가 가진 약함과 한계를 가지고 그 나름대로 인생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죄스럽고 못난 모습도 있는 그대로 주님께서는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모든 경험을 다 하신 분이시기에 누구보다 우리의 약함과 한계를 잘 아십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 빛 속에서 사는 삶이 됩니다. 곧 우리 인생의 멍에는 가벼워집니다.

온전한 사랑

자신의 모습 가운데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요? 좀더 잘 살아 보고 싶고 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늘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사실 아무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빈틈없고 완전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고치기 어려운 결점을 안고 삽니다. 부부의 경우 누구보다 가깝기에 배우자의 결점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우자가 제발 이것만 고쳤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것이 한둘은 꼭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싸움을 해도 끝까지 고치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안고 사는 한두 가지 결점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양' 의 비유나 '잃어버린 은전 한 닢' 에 대한 비유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내면의 문제에 고나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잃어버렸다' 는 것은 내면의 '불완전함'의 이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안고 사는 내면의 결핍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라고 하신 것처럼 더욱더 완전한 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 나를 찾을 수 있는지요? 그것은 결점을 고치고 결핍을 채워서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사랑할 때는 상대방의 약점까지도 아름답게 보다가도 미운 마음이 들 때는 그 약점 때문에 상대방이 온통 새까맣게 보이는 경우와 똑 같습니다. 상대방의 약점도 사랑하는 연습으로 고쳐집니다. 사실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고쳐지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완전한 숫자인 100을 이루고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인생 여정도 바로 온전한 사랑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자신도 상대방도 완전해 집...

우리 인생의 올바른 판결

나이 30대의 어느 여성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에 직업도 안정되었으며 다른 외적조건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이제 딱 한 가지 멋진남자를 만나서 혼인만 하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의 매일 기도 주제는 좋은 남자를 만나 혼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도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한 채 그녀의 나이는 어느새 마흔이 되어 버렸습니다.그 여성은 지쳤고 절망햇습니다. 친구들도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인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자 삶은 더욱 외로워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겼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였지요. "내생각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이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이사55,8-9) 하느님의 뜻은 우리 뜻과 다를 때가 매우 많습니다. 하늘과 땅의 높이와 깊이만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뜻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감추시고 맙니다. 만일 마흔에 이른 그 여성이 그토록 바라던 혼인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것으로 여기고 슬프게만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하느님마저도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녀의 인생은 늘 공허하고 외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느님께서 더 큰 무엇을 주시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운명을 주신다고 넓게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그에게 끊임없이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

<사랑하니까> -용혜원-

-용혜원- 사랑이란 함께 걷는 것이다.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같이 걷는 것이다. 서로의 높이를 같이하고 마음의 넓이를 같이하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까지 둘이 닮아가는 것이다.

위기는 선물이다. <성령 칠은-경외>-안젤름 그륀 신부-

Ⅲ) 위기는 선물이다. - ⑦ 일곱가지 선물 중에서 경외의 선물 성경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초라고 말한다.(시편111,19) 하느님은 나를 내적으로 압도하고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시다. 일출의 장엄한 아름다움이든 뇌우의 위협이든, 어떤 것에 대한 깊은 체험은 인간 영혼에 충격을 준다. 이런 체험은 그 자체로 두려움 또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사로잡힌다는 것,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하느님의 탁월성을 지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하느님께 삶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첨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모든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외는 위기를 상대화한다. 위기가 내 삶을 흔든다 해도 나는 위기를 하느님 뜻과 동등하게 여기거나 하느님께서 위기를 보내셨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의 형벌’과 같은 개념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위기를 통해 겪는 동요를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동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위기 가운데 있는 나를 어루만지신다. 위기를 겪을 때면 나는 충격을 받아 삶을 추스르지 못하고 계속하여 큰 동요를 느낀다. 이런 동요는 삶을 새롭게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기준을 설정하라고 경고한다. “위기는 선물이다.”

겸손![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잘못한 것 같아요. 지금 기분이~~ 어떻게 성당을 어떻게 갑자기 불릴 재간도 없고~~ 제가 잘못한 건 없죠? 제의실로 들어가셔도 돼요. 할머니, 거기 거 불 때고 있다니까 제의실 넓은데...... 난 추워서 안 올 줄 알았죠! 그냥 편안하게 계시지~~^^ 지금 11월이면 무슨 성월이죠? 아주 구두쇠 부자영감이 계셨데요. 아무튼 돈을 모으는 거, 그 목적으로 살았어요. 일가친척들한테도 아무리 그 사람들이 어려워도 정말 다른 사람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돈을 모았데요. 그래서 이제는 뭐 통장도 다섯 개 여섯 개가 되고/ 서울 강남에도 빌딩이 하나 있어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세만해도 한 달에 뭐 몇 천만 원씩이 되고/ 뭐 강릉 쪽에도 뭐 또 땅이 있고/ 아무튼 뭐 이래가지고 유일한 재미가 뭐겠어요. 통장 들여다보고 돈 불어나는 거 이게 재미였겠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주 배가 쥐어뜯을 듯이 아파.... 너무너무 아파요. 이분은 어디가 아프면 절대 병원에 안 갔거든요. 병원에 갈 돈이 어디 있어요? 아깝게.... 그러니까 유일한 약이 뭐냐? 배꼽에다 아까징끼 바르는 거, 어지간하면 또 다 나았어. 웬만한 병은 그냥 빨간약만 배꼽에다가 쳐바르면은 그 희한하게 다 낫더라~~ 이거야. 그래 유일한 약은 빨간 약 하나밖에 없어. 그날 배가 하두 쥐어뜯어서 빨간약을 배꼽에다 발랐는데.... 한 병을 다 쏟아 부어도 뭐 여전히 나을 기세가 없네~~ 뒹굴뒹굴 뒹굴 그러다가 큰아들을 불러가지고 “얘, 아이구 나 이러다 죽겠다. 병원에 좀 데려다 다오.” “하이구 세상에 살다 살다 아버지가 병원엘 다 가신다고 그러고 참 해가 딴 데서 뜨겠습니다.” 그래서 병원엘 모시고 갔어요. 근데 뭐 이제 간 김에 종합검사를 했지요. 종합검사 결과가 나와서 병원에 큰아들과 갔더니 의사가 혀를 차. “쯧쯧........” 그게 뭔 소리예요. “아이구 참 영감님,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수? 뱃속이 다 암덩어리유. 뱃속이 다....” 그러면서 “영감님, ...

최후심판의 잣대

2011.11.11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336-397) 축일 이사61,1-3ㄱ 마태25,31-40 최후심판의 잣대 누구나 직면해야 하는 최후심판입니다. 최후 심판의 잣대는 자비행입니다. 가을 열매들로 평가 받는 과일 나무들처럼 우리 역시 최후심판대에서는 사랑의 열매들로 평가 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들 잘 열려 익어갈 때 ‘충만한 삶’이요, 사랑의 열매들 빈약할 때 어김없이 따라오는 ‘공허한 삶’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6개 항목의 구체적 최후심판의 잣대를 통과한 의인을 통해 우리의 자비행을 비춰보게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 이어 주님의 말씀에 의아해 하는 의인에 대한 주님의 자상한 해명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주님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내 형제라 하며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시고 자신의 삶의 지침으로 삼아 평생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한 자비 행에 전력을 다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이 말씀을 받으셨고 평생 이 말씀대로 자비행을 실천하신 결과가 오늘의 최후심판의 복음입니다.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구체적으로 곤궁 중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의 실천으로 도우라는 간곡한 명령입니다. 최후심판의 복음을 참으로 엄중하게 받아들인 수도교부들이요...

믿음만 있으면 다 되는 겁니까? -안젤름 그륀 신부-

우리가 살면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바라고 굳게 믿는 것뿐이라고 어떤 친구는 말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가요? 어떻게 하면, 제 인생이 긍정적으로 바뀌도록 소망에 대한 의지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너는 그저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지요. 실제로 내가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자마자 그것이 내 수중에 굴러 들어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될 것이고, 신이 우리에게 성공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는 다면 분명 일정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믿는 것을 자동으로 불러내는 마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 속에서 나 자신을 신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내가 믿는 것은 신이 어린애 같은 내 소망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무언가를 내게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인생, 어찌하면 좋을까요? 안젤름 그륀 신부.
2011.11.12 토요일 성 요사팟 주교(1580-1623) 순교자 기념일 지혜18,14-16;19,6-9 루카18,1-8 끊임없는 기도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생명이자 삶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끊어져선 안 됩니다. 좋든 싫든 기도해야 삽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환경에 개의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래서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이자 하느님과의 싸움입니다. 이런 기도의 싸움은 죽어야 끝납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가 기도의 모범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무반응에 포기하고 싶은 내적 유혹도 많았을 것이나 과부는 결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여 불의한 재판관의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바로 자기와의 싸움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싸움에 승리한 기도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가 순수해야 항구할 수 있고 응답도 받습니다. ‘올바른 판결’이 뜻하는바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과부가 제 뜻대로가 아닌 올바른 판결을 위해 간청했듯이, 하느님의 뜻대로 항구히 기도할 때 응답을 받습니다. 매일 미사 묵상 부분의 다음 내용이 참 적절하여 인용합니다. “과부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판결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깃든 하느님 뜻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올바른 판결은 깊고 높은 하느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참 깊고 아름다운 묵상입니다. 하느님 안에 올바른 판결이 있고, 우리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항구히 하느님의 뜻을 찾아 기도할 때 하느님 안에 내 삶의 의미가,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계시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기도의 은총으로 내적변화요 치유입니다. 마음이 새로우면 모두가 새로운 법입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내외적 환경도 순조롭게 펼쳐집니다. 가끔 듣는 고백입니다. “외적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마음은 참 평화롭습니다. 예전처럼 힘들...

축복 받는 신앙인의 십계명

†찬미예수님 한 달 동안 별 일 없었지요? 별 일 많으셨습니까? 오늘 보니까 80%는 주로 보던 분들이고, 20%는 처음 보는 분들이십니다. 한 해가 빨리 지나갑니까? 아니면 잘 안 지나갑니까? 한 해가 정말 빨리 지나갑니다. 아유, 나 이러다 환갑 며칠 안 남은 것 같아~~왜 이렇게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는지.... 1월 초부터 가정방문을 다니고 있습니다. 3월부터는 순례자들이 워낙 많이 오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을 써야 되니까 본당신자들과 만날 시간은 겨울밖에 없어요. 제가 오고 이곳 체제가 좀 바뀌었어요. 본당 신부노릇도 해야 하고, 순례지 신부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본당신부 노릇 하기도 벅찬 데예요. 청주교구 母본당, 첫 번째 어머니본당이라 본당신부하기도 수월하거나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그런데 순례지 신부까지 해야 되니까~~ 나중에 한 10년 후쯤이나 될까~~ 그때는 순례지 전담신부, 본당신부 따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작년 10월에 주교님께서 이곳을 순례지로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렇게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순례지가 되는 것은 아니죠? 순례지에 걸맞게끔 여러 가지로 해야 될 것이 참 많아요. 여기 본당신자들이 보면 ‘아, 순례지로 선포도 되었고, 그렇게 숙원사업이던 화장실도 지었고, 주차장도 흙에서 이렇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순례지가 다 되었나보다!’ 아니죠~~ 이제 마스터플랜이 나왔어요! 마스터플랜 짜는 데만 3000만원이 들었습니다. 그 마스터플랜에 의해서 향후 이렇게 순례지가 된다! 순례자들이 와서 한 눈에 보고 ‘이렇게 세워지겠구나!’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지요!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예처럼 외국에서도 순례 객이 오려면 여러 가지 작업이 필요하지요? 순례객 중에 불어권 사람이 올 수도 있고, 영어권 사람이 올 수도 있고.... 그런데 지금 사무장이나 사무실 직원 보고 지금부터 일어, 불어학원 다니라고 할 수 없잖아요. 쏼라~~쏼라 대고 눈 노~오란 사람이 와서 뭐라고 하면 사무장 어떻게 할 거예요? 손짓, 발짓...

마지막 강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얼마 전에 읽었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 카네기 벨런 대학의 랜디포시 교수는 47세의 나이로 컴퓨터 공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췌장암 말기로 몇 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지요.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교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바싹 마른 얼굴로 마지막 강의를 진행합니다. 이것이 미국 전체에 인터넷으로 전해지면서 500만 명의 국민들을 울렸고, 그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어 저 역시 읽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강의에서 이렇게 강조하여 말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인생의 벽이 있는데 이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 지를 시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당신이 뭔가 망쳤다면 사과하세요.”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주세요.” “행운은 준비된 자가 기회를 만날 때 오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말씀들이 지금 우리의 가슴 속을 마구 흔드는 것 같네요. 지금 내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나에게 부족한 것들을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실천하세요.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연중 제33주일 - 환난의 시대

†찬미예수님 날이 많이 춥습니다. 그렇죠? 지금 여러분들 미사시간 맞춰서 오느라고 바쁘셨지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식구들 밥 해줘야 되고.... 또 우리 자매들은 뭐 또 화장품 몇 개 찍어 발라야 되고.. 복잡합니다. 한 번 떠나려면.....잘오셨습니다. 우리 본당 신자들도 잘 계셨죠?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우리본당 신자들 보는 맛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죠? 네, 대답이 시원치 않네요....^^ 뭐를 조사하는 데를 ‘리써치’ 그런 조사기관이 많아요. 대선을 앞두고 이것저것 조사하지만.... 그런 조사가 아니라 요즘사람들이 살면서 물론 차이가 있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이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뭡니까? 텔레비전에도 듣고 뉴스에서도 듣고...... “아이구, 말세야 말세” 그 말을 제일 많이 한데요. 자기도 모르게 “아이구, 말세야 말세! ”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세라고 표현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금이 세상 끝날! 다시 말하면 환난의 시대다!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 오늘 여러분들이 들은 복음은 분명히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내가 앞으로 올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는 것을 얘기해주셨어요. 그런데 2천년이 지나갔지만 아직 주님 재림이 안 왔어요. 뭐 이천년이 지나도 주님 재림이 안 오는데... 아직 우리시대는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정할 수가 없지요? 바오로 사도는 곧 주님의 재림이 올 것 같기 때문에 가능한 한 시집장가 가지 말고 독신으로 주님재림 맞이하자 그랬어요. 그랬는데 이천년 지났는데 아직 주님의 재림이 안 왔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하루하루 따지는 이 날과 주님의 날은 다르다는 거지요! 시편에 보면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 지났지만 하느님 쪽에서 볼 때는 며칠? 이틀밖에 안 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시대에는 이런 세상종말이 절대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아무도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믿음을 주는 것이 전세계에서 교회가 인정한 성모님의...

위기는 선물이다.<성령 송가> -안젤름 그륀 신부-

Ⅳ) 위기는 선물이다. - 그리스도인들이 외적•내적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위기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성령 송가는 도움이 되었다. 성령 송가, “오소서, 성령님”은 1200년경 스테판 랭턴이 지었다. 알프레드 델프가 1944년 베를린 테겔 감옥에서 이 아름다운 기도문을 묵상하면서, 정리했던 사상을 깊이 음미하고 그의 해석을 우리 시대에 알맞게 소개하고 싶다. 알프레드 델프는 처음엔 뮌헨의 비밀경찰청에 구금되어 있다 1944년 9월 7일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감옥생활을 하다 베를린 테겔로, 마지막으로는 플뢰텐제로 이송되어 1945년 2월 2일 처형되었다. 알프레드 델프는 성령께 모든 희망을 두었다. 성령은 악령을 쫓아내시고, 거룩하고 치유하는 영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실 수 있다. 따라서 성령 송가에 대한 그의 묵상은 우리 시대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감옥에 갇힌 그는 늘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렸지만 성령 묵상은 희망을 더욱 북돋아 주었다. 그는 묵상을 통해 비인간적 세계에서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감옥에서 환상의 세계로 피신하는 도피가 아니라 감옥과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심문의 비참한 세계를 견뎌내기 위해 성령의 세계에 깊이 잠기는 것이었다. “위기는 선물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눈(目)’과 ‘봄(見)’

2011.11.14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마카베오 상1,10-15.41-43.54-57.62-64 루카18,35-43 ‘눈(目)’과 ‘봄(見)’ 오늘은 ‘눈(目)’과 ‘봄(見)’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눈이 열리다’ ‘눈을 뜨다’ ‘눈이 멀다’ ‘눈이 가리다’ ‘눈높이를 맞추다.’… 등 눈에 관련된 말은 끝이 없습니다. 역시 ‘봄(見)’에 관련된 볼 ‘견(見)’자가 들어가는 말도 많습니다. 견해(見解), 견성(見性), 선입견(先入見), 편견(偏見) 등이요, 관상(觀想), 각자(覺者)에서 보다시피 봄(見)과 깨달음(覺)이 깊은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있는 그대로, 제대로 잘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잘 봐야 올바른 판단입니다. 하여 신언서판(身言書判) 중 으뜸으로 치는 게 ‘판단(判斷)’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개의 길인 팔정도(八正道) 역시 바르게 보는 ‘정견(正見)에서 시작됩니다. 정견(正見)에 이어 정사유(正思惟;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바르게 말하기), 정업(定業;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바르게 깨어있기),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기)로 이어집니다. 저는 오늘 복음 장면이 흡사 미사장면을 압축한 듯 보였습니다. 길목에서 주님을 기다리던 눈 먼 걸인은 주님이 나타나자마자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 먼 걸인은 그대로 주님을 갈망하는 우리 구도자를 상징합니다. 우리 역시 매일 미사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주님을 만나자마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세 번씩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 기도를 바치며 미사를 시작합니다. 간절히 찾고 부를 때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문 먼 걸인의 갈망을 꿰뚫어 본, 주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에 걸인의 즉답입니다. 소원이 간절할수록 소원은 짧고 단순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진정 구...

빛의 자녀들

2011.11.13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잠언31,10-13.19-20.30-31 1테살5,1-6 마태25,14-30 빛의 자녀들 함께 해도 단풍잎들 다 떨어진 나무들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11월입니다. 바로 이 때 자문, 자답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믿는 이들 누구나 물어야 할 아주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수도자는 무엇인가?’매일 묻는 자가 수도자란 말도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답은 단 하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요,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여기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며 방향이라는, 한 마디로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빠지면 그야말로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허무 그 자체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빛의 자녀들입니다. 오늘은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빛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말씀 묵상 중 지혜서의 다음 대목 중 ‘경외(敬畏)’라는 말이 참 반가웠습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더불어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났습니다. ‘부부간의 열정은 잠시고 신뢰만이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우아함도, 아름다움도 잠시지만 하느님 경외는, 하느님 신뢰는 영원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지혜요 단순한 삶입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좌우명도 위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이었습니다. 오늘 집회서의 주님을 경외하며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여인은 과연 경천애인의 모범입니다. 오늘날 불행과 혼란은 하늘을, 하느님 경외를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

♣ 우리가 겸손해야하는 이유

♣ 우리가 겸손해야하는 이유 겸손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기 인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겸손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너의 모든 겸손은 너 자신을 아는데 있다.” 우리의 겸손은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 낮추신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 그분의 겸손을 모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완전히 하느님께 의존하며, 하느님 손에 달려있는 존재다. 겸손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경험한 인간이 하느님께 대하여 가지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자세이다. 이 제한성은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겸손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에서 나온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루가 14,11) 참고한 글 “아래로부터의 영성” Anselm Gruen 신부.

♡ 기쁨을 드리는 것 ♡

저는 이제 진실이 아니거나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커다란 축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허영이며 거짓입니다. 세속적 지혜를 넘어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달라고 청하며 진리 안에서 살려는 소망을 가지면 이겨내지 못할 어려움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하는 30일묵상(양장)」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