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11의 게시물 표시

영적인 규칙 생활,

우리는 그저 감정의 기복에 따라 휘둘리는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오늘은 끝내줘” “오늘은 영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내 기분에 맞춰주기를 바라면서, 그날그날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실 감정이나 기분을 통제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영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보면 점차 극복할 수도 있게 된다. 영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해 가면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인생이란 것이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느끼”거나,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그저 내가 하는 일이 지겹고 따분한 일이라고 “느끼”면서 도대체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날 기분이 영 내키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일어나 그날의 복음을 읽고, 시편으로 기도하며, 새로운 날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행동들을 꾸준히 반복하다보면 나를 사로잡고마는 감정과 기분의 기복은 점점 그 힘을 잃게 된다.

칭찬을 하면!

♣ 칭찬을 하면! 가슴 속에 꽃이 피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한다. 칭찬을 받으면 기쁨이 솟아나고 가슴 속에 꽃이 피어난다. 칭찬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입니다. 칭찬을 하려면 솔직함, 자연스러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어 찬사를 보내야 합니다. 칭찬을 함으로써 당신은 세상을 또 다른 빛으로 볼 수 있다.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도록 해주는 것도 바로 칭찬인 것입니다. 칭찬은 당신의 영혼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Anselm Gruen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칭찬을 하거나 또는 잘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신이나서 더욱 잘하려고 하고 칭찬 받을 짖을 찾고, 또는 칭찬에 힘이 나서 더욱 노력하고 흥이 나서 어려움도 모르고 칭찬 받을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칭찬을 좋아하시고 하느님이 주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감사해야 할 일을 더욱 많이 주십니다. 오죽하시면 하느님께서도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탈출34,14) 우리가 기뻐하면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우리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사를 보내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들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기뻐하는 그모습에 찬양을 보내 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우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 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전능하시고 자배하신 하느님!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오늘을 살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며 항상 기뻐하며 끊임없이 기도하게 하시어 주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원한 사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히브7,1-3.15-17 마르3,1-6 "영원한 사제" 별개의 영원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는 영원이요 영원 안에 있는 시간입니다. 영원을 통해 성화되는 시간입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매일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 계속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 늘 그 자리의 불암산, 언제나 그 자리에 살고 있는 정주의 수도승들 모두가 영원을 상징합니다. 땅위 곳곳의 하얀 잔설(殘雪)들 역시 ‘하늘 꿈’의, ‘영원’의 흔적을 상징하는 듯 흑백의 조화가 참 신비롭습니다. 하느님의 영원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영원을, 영원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영원의 체험은 바로 하느님 체험입니다. ‘영원을 생각 않는 인간이라면 제 몸을 죄악에다 묶고 마오니’란 시편 구절도 있듯이, 영원을, 하느님을 체험해 갈 때 비로소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 있는 삶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하지 않습니까. 시간도 하느님 앞에는 상대화 되어 하느님께는 늘 영원한 오늘뿐입니다. 하여 깨달은 분들은 관심사는 오래 살고 짧게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에 일생을 담아 영원을 살 수 있는가가 문제였습니다. 성불사 주지인 학명 스님의 글이 좋습니다. 묵은해니 새해니 가리지 말게 겨울가고 봄이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라고,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살지. 과거에 아파하거나 후회하지도 말고, 또 미래에 대한 온갖 환상 말끔히 버리고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영원을 체험한 이들은 오늘 여기서 가까이 만나는 사람들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일일일생의 삶을 삽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늘 지금 여기서 맡겨진 사람과 사명에 올인(all-in)하면서 영원한 현재를 사신 예수님이셨고 그분의 사명을 두말로 요약하면 정의와 평화였습니다...

<구원을 위한 세 가지 당부>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마르코 3,1-6 “손을 뻗어라.” 언젠가 운동하다가 오른팔을 다쳐 한 달 정도 깁스를 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정말 불편하더군요. 여름에 그랬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깁스한 부위가 가려울 때 정말 미칠 뻔 했습니다. 너무 가려운 나머지 드릴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막대기를 넣어 긁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쓰는 것, 밥 먹는 것, 물건 드는 것... 등등. 또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반가움의 표시로 많은 분들이 악수를 청합니다. 깁스를 하게 되니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불편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겪은 여러 불편 가운데 가장 큰 불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육체적 불편은 그나마 견딜만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불편은 정신적, 심리적 불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손이 오그라듦으로 인해 그는 다양한 소외감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선 오그라든 손이 눈에 띄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시선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놀이할 때나 일할 때나 그 어떤 것을 할 때도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늘 제약을 받아왔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열등감, 소외감, 우울함, 고독감에 사로잡혀 힘겹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받지 못했던 큰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듣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일어나라: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한 평생 의기소침해서 제대로 한번 당당하게 일어서보지 못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훌훌 털고, 안심하고, 나를 믿고 일어서라고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죄와 병고와 상처로 인해 일어나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 드러누워만 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

"영혼의 닻"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8. 연중 제2주간 화요일 히브6,10-20 마르2,23-28 "영혼의 닻" 하느님은 최고의 명의(名醫)이시며 희망은 최고의 명약(名藥)입니다. 하여 저의 이메일 주소에도 희망이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만든 주소(spes1004@hanmail.net)인데 참 마음에 듭니다. 라틴어 스페스(spes)는 ‘희망’이고, 아씨시 프란치스코의 축일은 10월04일이기에 붙이면 1004에 발음하면 ‘천사’이니 합쳐 발음하면 ‘희망천사’ 얼마나 좋습니까. 희망 없는 절망의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희망과 평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절망과 불안의 시대입니다. 희망의 빛 앞에 사라지는 절망의 어둠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 하느님만이 우리의 참 희망입니다. 보이는 희망들 다 사라져도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히 빛을 발하는 희망의 태양인 하느님입니다. 이 희망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17년간 암 투병 중 암을 극복한 어느 한의사의 고백이 큰 가르침입니다. “나는 암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암은 치료하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관리하는) 것임을. 그래서 암을 동반자로 삼았다. 나쁜 친구를 좋은 스승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몸뿐 아니라 생활습관도 바뀌고 ‘참 나’를 발견했다. 참된 치유의 길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암은 앎’이기 때문이다.” 참 의미심장한 통찰의 지혜입니다. 삶의 의미이신 희망의 하느님을 만나 알아 갈 때 심신의 치유와 자유입니다. 치유와 자유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에 주목되는 단어 역시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밝아집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마르코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바리사이들, 연구해보니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그들의 집착, 애정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안식일, 과연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안식일 규정, 최초의 의도는 참으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 날 사람들은 푹 쉬었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분께 감사드리는 표현으로 제사를 올렸고,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날은 힘든 노동으로 고생이 많은 노예나 가축들도 배려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이날만큼은 푹 쉬도록 여유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안식일을 신성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흔적들이 잘 남아있습니다. 적들과 전쟁을 치루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안식일 규정을 잘 알고 있었던 적들은 야비하게도 안식일 날 진군해옵니다. 적군에 맞서는 것 역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대응하지 않습니다. 목숨까지 걸면서 안식일 규정을 지킨 것입니다. 안식일,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확대된 안식일 규정은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점차 희석되었고 점점 변질되어 갔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매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신 분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그저 자나 깨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저 우리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만을 바라시는 분,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지내기를 학수고대하시는 분... 그 아들 예수님 역시 단순하셨습니다. 어렵게 말씀하지 않...

"인생 디자인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7 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251-356) 히브5,1-10 마르2,18-22 "인생 디자인" 그냥 놔두지 못하고 손대고 싶어 하는 디자인 본능을 지닌 사람입니다. 어느 형제님 집을 방문했다가 장작불 난로 따뜻한 운치 있는 휴게실 구석 탁자위의 기묘한 돌들과 몇 그루의 분재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어, 돌들이 참 기묘하네요.” 이어 묻지도 않은 형제님의 대답이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느님 믿기 전에는 온통 돌 모으기와 분재에 몰두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보니 이 또한 우상 숭배 이더군요. 하느님을 믿으니 저절로 이 취미들 사라졌습니다.” 돌 모아 이리저리 배치하고 감상하는 것이나, 이런저런 나무들 분재하여 놓고 감상하는 것 역시 디자인 본능의 표출입니다. 하느님을 믿은 후 보이는 것들의 디자인에서 내 인생 디자인으로 전환됐음을 뜻합니다. 바로 이게 회개입니다. 내 인생 디자인 보다 더 중요한 디자인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묵상 주제는 ‘인생 디자인’으로 참 재미있고 의미심장합니다. 수도원 정문을 들어서면 눈길 가는 게 왼쪽 수도원 담장 넘어 쭉 늘어서 있는 수녀원의 참나무들입니다. 참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자란, 마음 넉넉하고 편안하게 하는 참나무들과 수도원 배 밭의 전지로 인해 잘 디자인된 배나무들의 대조가 참 재미있습니다. 전자의 참나무가 이상이라면 후자의 배나무는 현실입니다. 최대한의 수확에 일하기 편리함을 목적으로 하는 배나무이기에 전지를 통한 인위의 디자인은 필수입니다. 그냥 참나무처럼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방치한다면 풍성한 열매의 수확은 기대할 수 없고 일하기도 불편하고 힘들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나무만 디자인이 아닙니다. 과연 디자인의 시대라 불릴만합니다. 급기야는 4대강의 디자인은 물론 전국토가 디자인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자연을 배려하지 않은 자연과의 조화와 균형이 깨진 일방적인 인간 중심, 이익...

<달라진 얼굴>

1월 17일 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 마르2,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서원을 앞두고 긴 피정을 마친 형제들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피정이 얼마나 좋았던지 얼굴 색깔까지 다릅니다. 피정의 결실도 대단합니다. 한 형제는 평소 자신이 제일 아끼는 옷 한 벌을 제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피정기간동안 하느님 외에 부차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크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앞으로 하느님께만 충실하겠다는 표현으로 옷을 가져온 것입니다. 한 형제는 그러지 말라고 해도 지나칠 정도로 음식을 절제하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그랬습니다. 피정기간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내면의 어두움과 죄를 직면하게 되었고, 큰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얼굴도 뵙게 되었다. 부끄러운 지난 삶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치유해주신 주님, 이런 주님 자비에 대한 보답으로 절제된 생활을 선택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서원을 앞두고 ‘과거의 나’란 낡은 옷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옷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형제들의 모습이 참으로 빛나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어제와 결별하고 산뜻하게 새 출발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분신 예수님, 우리를 향한 그분 사랑의 눈빛은 얼마나 강렬한지 모릅니다. 그분의 절절한 사랑으로, 불타는 눈빛 한번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는 또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한번 그분의 맛을 본 사람은 세상 모든 시름을 다 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그분 가까이, 어떻게 하면 조금만 더 오래 그분 옆에 머무를까, 그것이 그 사람에게 남겨질 유일한 과제입니다. 10년 만에 사법고시에 최종적으...

나를 키우는 말-이해인

나를 키우는 말-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말하면서 다시 알지...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6 연중 제2주일 이사49,3.5-6 1코린1,1-3 요한1,29-34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말씀 따라 오늘 강론 제목은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로 정했습니다. 마침 ‘한 빛나’라는 자매의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빛나는 삶을 살라고 어머니가 ‘빛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데 참 좋은 이름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았던 주님의 종들입니다. 큰 인물이 세상을 떠나면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요 몇 년간 참 많은 큰 별들이 떨어졌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두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얼마 전에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이 영희 선생과 이 돈명 변호사가 세상을 떠났고, 또 이리저리 크고 작은 많은 별들이 떨어졌습니다. 새삼 세상을 밝힐 하늘의 별 같은 주님의 종들이 절실한 시절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 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살라고 불림 받은 주님의 종들입니다. 문득10년 전 봄철에 써놓은 민들레꽃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예전 집짓기 전 한옥 같은 수도원 숙소 뒤뜰 마당에는 봄마다 민들레꽃이 가득했었습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미국에서 잠시 공부하던 중 이 시를 영역하여 발표했을 때, 이심전심 이 시를 극찬했던 교수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종이 되어 하늘의 별처럼 살라고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 모두 주님의 종이 되어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눈이 있다고 다 똑같은 눈이 아닙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입니다. 마음...

"믿음의 길"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5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 축일 집회2,7-13 마태14,28-33 "믿음의 길" 오늘은 길에 대해, 믿음의 길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믿음의 길은 바로 의인의 길이기도 합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 아름다운 후렴 하나를 소개합니다. “의인의 길은 동트는 여명의 빛살 같으니, 그 빛은 점점 밝아져 한낮에 이르는 도다.” 길이라 하여 다 길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늘에도 항로가 있고, 바다에는 해로가 있으며 땅에는 육로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죽음과 파멸에 이르는 길도 많습니다. 길을 잘 못 들어 많은 고생을 하듯이 인생 길 잘못 들어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생명에 이르는 진리의 길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갈 때 비로소 안전한 주님의 길, 믿음의 길입니다. 모두 주님을 향한 길이지만 사람마다 그 믿음의 길은 다 다릅니다. 믿음의 길은 순종의 길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오너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두려움에 주님 향한 시선을 놓지는 순간 길을 잃어버려 순식간에 물속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믿음은 순종이요 순종은 계속 주님께 시선을 두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 향한 시선을 잃어 길을 잃어버릴 때 마음은 심연을 알 수 없는 바다로 변합니다. 허무주의의 바다, 절망의 바다. 탐욕의 바다, 미움이 바다, 두려움의 바다, 불신의 바다, 불안의 바다, 분노의 바다, 질투의 바다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 향한 시선을 잃어, 길을 잃어버려 이런 마음의 바다, 세상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을 때 그대로 안전한 인생길입니다. 믿음의 길은 기도의 길입니다.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물속에 빠져드는 순간 베드로의 기도가 참 기민합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누가 주님께 부...

<완벽한 조연 세례자 요한>

1월 16일 연중 제2주일 - 요한. 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오세영 시인의 '12월'이란 시(詩)를 좋아하는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마치 세례자 요한의 삶을 두고 지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뛰어난 언변과 타고난 지도력으로 당대 백성들에게서 큰 추앙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얼마나 경건했던지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오시기로 된 메시아일거야'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자 요한은 진정 겸손했습니다. 자신의 신원,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 '예수님이 주연인 연극에 가장 충실한 조연'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자 예수님을 향해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고 거침없이 외칩니다. 긴가민가하고 의구심을 갖던 당대 백성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틀림없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다한 세례자 요한은 깔끔하게 꾸며진 무대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조용히 뒤로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주연인 구세사 무대에 최고의 '남우조연상...

명품, 좋아하세요?(손명찬, ‘꽃단배 떠가네’ 중에서)

명품, 좋아하세요?(손명찬, ‘꽃단배 떠가네’ 중에서) 2억원을 호가하는 시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속이 박혀 있기도 하지만 비싼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시계를 만든 스위스의 명장은 두 달에 한 개꼴로 작업하며, 일 년에 여섯 개 이상은 못 만든다는군요. 시대의 명품들에서 공통점을 봅니다. 당당한 브랜드 이름, 희소가치, 부여된 의미, 비싼 가격입니다. 그러고 보니 명품도 무언가를 닮았습니다. 분명합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당당한 브랜드 이름 - 이 얼굴로 생긴 사람 중에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이름. 희소가치 -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증하는 작품 중의 작품(전화로도 부모님께 바로 확인 가능. “그럼 내 새끼가 어떤 새낀데!” 부여된 의미 -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중심. 마지막으로. 비싼 가격 - 최고의 명품들을 다 합해 놔도 이보다 더 비쌀 수는 없다! 바로 나, 바로 당신. 명품이 모델로 삼은 진품. ‘원조명장’ 신이 만들고 ‘좋았더라.’라고 선언된 바 있는…….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초점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마르코 2장 13-17절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언젠가 한 건물에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새까만 정장차림의 어깨들이 입구부터 시작해서 나란히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얼굴들도 한결같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데,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조폭 두목 쯤 되는 사람의 결혼식이었는가 봅니다. 그때 속으로 엄청 웃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사제와 조폭의 공통점, ‘검정 옷을 즐겨 입는다’ ‘우르르 잘 몰려다닌다’ ‘각자 영역이 확실하다’.... 오늘 예수님께서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예수님 시대 세리들은 오늘날 ‘그들’과 비슷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들이 공포에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런 세리의 두목인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그야말로 ‘깜놀’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

"믿음과 안식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4 연중 제1주간 금요일 히브4,1-5,11 마르2,1-12 "믿음과 안식처" 집이, 방이 좋아야 합니다. 자기 집을, 자기 방을 지니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집이, 방이 좋으면 마음 또한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이 방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에 불안이나 두려움 가득하면 안식처로서의 집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맙니다. 여기서 집이나 방이 상징하는 바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영원한 참 안식처는 주님이십니다. 다음 복음 구절도 이를 분명히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의 안식처를 찾아 끊임없이 수도원을, 성전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 첫 장면의 묘사도 주님이 참 안식처임을 입증합니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우리의 진정한 제자리의 안식처는 바로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구절입니다. 참 안식을 주는 영원한 안식처는 주님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평화로운 사람들 참 안식처인 주님 안에 있는 정주의 사람들이요, 반면 늘 불안하고 불화한 이들은 안식처인 주님을 벗어난 이들입니다. 참 가깝고도 먼 참 안식처입니다. 주님과 함께함을 깨달아 살 때는 지금 여기가 안식처이지만 이를 깨닫지 못할 때는 참 멀리 느껴지는 안식처입니다. 제자리의 참 안식처인 주님께 이르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항구한 믿음을 통해 안식처에 이르고, 안식처에서의 삶입니다. 항구한 믿음의 표상에 오래된 나무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제가 즐겨 읽는 ‘나무와 사람이야기’라는 신문 칼럼에 어제 나온 나무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천연기념물381호인 경기 이천 도립리에 있는 반룡송이라는 1000년전 통일 삼국시대 도선 스님이 심은 나무라합니다. 나무의 모습 자체가 항구한 믿음의 표상이요 감동입니다. 마을의 말없는 수호...

♥내적 평안을 방해하는 분노와 불순한 정욕과의 싸움

욕망을 모조리 없애 버려서 욕망을 이기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싸움에서 승리할 경우 그 욕망은 내 정신적 삶을 강하게 하고 생생하게 한다. 욕망이 없을 경우 영성도 힘을 잃고 지루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욕망을 자신의 영적 길 안으로 소화해 들이면, 그 욕망을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위한 중요한 원천이 된다. 공격성과 성욕은 삶의 에너지를 위한 매우 중요한 두 원천이다. 이 두 종류의 에너지 원천과 잘 지낼 수 있느냐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느냐와 내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문제와 직결된 사항이다. 우리가 이 두 종류의 힘을 우리의 전체적인 삶의 영역 안에 잘 소화해 들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들은 우리가 내적인 고요함과 평안을 누리는 데에 언제나 방해할 것이다. 분노는 우리를 분열시킬 것이며, 성적 상상들은 우리를 결코 평안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다시 찾은 마음의 평화」중에서- ♣욕망들 특히 공격성(분노)과 성욕은 강한 에너지이기에 정면 승부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달래서 승화하여 삶의 생생한 에너지로 활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욕망이 없을 경우 영성은 힘을 잃고 지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 기복,

우리들의 감정은 참 기복이 심하다. 때로는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크게 요동치는 것을 체험하곤 한다. 흥분이 되었다가 축 처졌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내적인 조화와 평온을 느꼈다가, 갑자기 내적인 혼란을 느꼈다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주 사소한 사건, 누군가에게 들었던 한 마디 말, 일에서 오는 조그만 실망 등 수많은 것들이 내 감정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조절해야 될지 잘 모른다. 사실 내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내용들은 모두 내게 일어난 것들이지 내가 만들어 낸 것들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내 감정기복에 따라 영적인 생활도 오르락 내리락 거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영적인 생활은 하느님의 성령이 내 안에서 살아가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함,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포기는 커다란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예, 저는 당신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받아들이며, 당신께서 무엇을 가져가시든지 드리겠습니다."라는 한마디 말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거룩하게 되는 단순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어려움을 지어 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일들을 해야 하고, 어려운 것들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느님께 드렸기에 내가 그분께 속하는 것ㅡ 나 자신의 온전한 의탁이기 때문에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이곳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다른 곳에 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사용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 까닭은 내가 아주 완전히 그분께 속해 있으므로 그분은 나에 대해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문제 삼지 않으니>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마르코 2장 1-12절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희망으로 가득 차서 달려왔던 중풍병자와 일행은 큰 난관, 엄청난 문제 앞에 직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일사천리로 해결될 줄 알았는데, 웬걸, 엄청난 장벽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인파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새치기 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작은 소동들도 벌어졌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사도들은 ‘완장’ 하나씩 차고 질서유지에 전념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크게 상심하고 낙담한 중풍병자 일행이었습니다. 분위기를 봐서 새치기는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몰매 맞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그 먼 길을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저 중환자를 그냥 줄 세워 며칠을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일,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인 중풍병자 일행의 태도를 보십시오. 장벽이나 문제 앞에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민을 다 했습니다. A안, B안, C안, D안...각 안의 타당성과 실현성, 적법성을 두고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기가 막힌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새치기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사정사정해도, 거기 온 환자들이 다들 워낙 중한 환자들이고 오래도록 줄서있던 사람들이어서 씨도 안 먹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계획했습니다줄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줄은 지붕으로 올라가는 줄이었습니다. 너무나 황당한 줄이었지만,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아이디어였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정성에 탄복합니다. 그들의 기발한 ...

다리가 되는것,

서로 이웃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벌어져있는 틈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서로 간에 거리가 있어 서로서로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면, 온갖 그릇된 생각과 허상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웃이 된다면서 내 식대로 어떤 이름표를 붙여주거나, 상대방에 대한 우스개를 지어내기도 하며, 내가 가진 선입견으로 매도하기도 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게도 된다. 상대방도 내가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내가 내 자녀를 돌보듯이 자기 자녀를 돌보며, 내가 아프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상대방도 아프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상대방이 바로 내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서 상대방을 내 식대로 처리하거나 해치워버릴 일의 대상물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이다. 길을 되짚어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건너가 상대방의 눈을 깊게 들여다 볼 용기를 가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 서로가 동일한 하느님의 자녀이며 동일한 인류가족의 일원임을 알게 된다.

"제자리, 제 궤도에 충실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히브3,7-14 마르1,40-45 "제자리, 제 궤도에 충실한 삶" 아침 성무일도 집회서 독서 시 다음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태양을 만드신 주님은 위대하시며 태양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제 궤도를 달린다. 달도 언제나 제 궤도에 충실하다.” 과연 제 궤도에 충실한 삶인지요? 제자리에서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안정과 평화입니다. 제자리, 제 궤도를 벗어날 때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제자리의 안식처에 자리 잡을 때 치유와 구원이요, 제자리의 안식처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제들을 위한 기도 첫 부분입니다. “주의 성심(聖心) 속에 사제들의 안식처를 마련하시어 아무도 감히 그들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사제들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제자리의 안식처는 주의 성심뿐입니다. 그리스도 안, 제자리에 안식처에 머물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시편 45장을 렉시오 디비나 한 히브리서 다음 말씀 역시 주님이 바로 안식처임을 말해줍니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말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저기 어딘가에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가 주님의 안식처입니다.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우리 모두에게 ‘오늘’ 지금 여기의 제자리에서의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제자리의 안식처인 그리스도 안에서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영적나병과도 같은 완고한 마음은 ...

연중 제1주일 목요일 -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찬미예수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또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의 영적 당부 를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된 삶을 말씀하시고 두 번째는 순명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계시고 세 번째는 감사가 무엇인지를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전해주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같이 연중 28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복음가운데 깊은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도록 합시다. 첫 번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 , 그렇지요? 이게 오늘 복음의 첫 번째 테마입니다. 예수님 앞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나병환자 열사람이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데 그 열 명 가운데 한명이 누구였느냐?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웬수지간입니다. 죽었다 깨도 공동체를 이룰래야 이룰 수가 없는 그 두 족속, 유대인과 사마리아가 같은 문둥이라고 하는 그 공동체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겁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웬수지간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같은 불운에 처해있을 때는 모든 장벽은 무너집니다. 문둥병과 종족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운명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겁니다. 고통을 당할 때 우리들은 평등해집니다. 재벌들도 고통을 당하면 아픕니다. 그리고 한번은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됩니다. 사제들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느님은 고통만큼은 평등하게 주십니다. 그리고 누구나 고통을 당하면 겸손해집니다.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도 고통을 통해서 가까워집니다. 언젠가 동물의 왕국을 봤는데 아프리카에서 갑자기 홍수가 났어요. 사자, 사슴, 멧돼지, 그 조그만 토끼 같은 것들이 산위로 산위로 피해가다가 산꼭대기 그 좁은데 맹수와 그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짐승들이 같이 모였습니다. 평소같으면 서로가 잡아먹고 죽여야 될 그런 관계인데도 그 홍수라고 하는 그 고통 앞에 그들은 서로 잡아먹지를 않고 물이 빠지기...

오늘의 삶에 감사하라!

♣ 오늘의 삶에 감사하라! 오늘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본다. 살아있음에 대하여 神에게 감사하라!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하루라는 점을 마음에 새겨라! 당신이 삶을 선택하는 순간, 자신의 힘과 더불어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을 어루만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이렇듯 나는 매순간 존재한다. 삶을 맛보고 있으며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어떤 날도 똑같은 날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독특하며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안젤름 그륀 신부. 오늘의 묵상: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에게 보장된 날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만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또한 살아 있을 때만이 우리는 이런 일 저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살아 있음에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이런 일 또는 저런일을 해야 하겠습니다"하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3-14)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런 일 저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야고4,15) 그러하오나 우리들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우리의 발 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라는 것을(잠언16,9) 알고 있아오니,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들 안에서 활동하시어, 우리들의 마음에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필리2,13참조)

<사랑이 내게로 다가온 날>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마르코 1장 40-45절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손길로 한 인생이 완전히 역전된 은총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랑, 그저 그런 사랑, 통속적인 사랑, 지나가는 사랑 말고 제대로 된 참 사랑의 결과는 놀랍게도 한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 역시 참 사랑의 체험으로 인해 새 인생, 새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 사랑을 만나기 전 그의 인생은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비참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며, 여러 차례 시도도 해봤습니다. 비관에 비관을 거듭하며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스스로 죽여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은혜롭게도 참 사랑이 다가온 것입니다. 전율과도 같은 그분의 손길이 그의 환부를 스치는 순간,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오랜 질병이 순식간에 치유되었습니다. 짧은 만남의 순간이었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순백과 인간의 얼룩이 만났는데, 그분의 순수함이 얼마나 강했던지 인간의 얼룩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냉담함이 만났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인간의 냉담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참 사랑과의 만남, 그리고 치유,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나병환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참 사랑이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서 저는 완전히 새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하느님께서는 왜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사나’ 하며 의기소침해있습니다. 우리가 이분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마음에 새기는 좋은 글

마음에 새기는 좋은 글 내가 받은 것은 가슴에 새겨두세요 미움은 물처럼 흘러 보내고 은혜는 황금처럼 귀히 간직하세요. 사람은 축복으로 태어났으며 하여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함부로 하지 말며 몸은 타인의 물건을 맡은 듯 소중히 하세요. 시기는 칼과 같아 몸을 해하고 욕심은 불과 같아 욕망을 태우며 욕망이 지나치면 몸과 마음 모두 상하게합니다. 모든 일에 넘침은 모자람 만 못하고 억지로 잘난척 하는것은 아니함만 못합니다. 내 삶이 비록 허물투성이라 해도 자책으로 현실을 흐리게 하지 않으며 교만으로 나아감을 막지 않으니 생각을 늘 게으르지 않게 하고 후회하기를 변명 삼아 하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 늘 진실이라 믿어야 하며 절대 간사한 웃음을 흘리지 않으리니 후회하고 다시 후회하여도 마음 다짐은 늘 바르게 하세요 오늘은 또 반성하고 내일은 희망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하느님 창문"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12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히브2,14-18 마르1,29-39 "하느님 창문" 며칠 전 초등학교 교장공모제에 지원한 옛 동료교사가 기도를 청하기 위해 수도원을 방문해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보다 더 열심히 잘 사셨네요.” 저절로 우러나온 저의 솔직한 감동의 고백이었습니다. 공모제에 지원한 제출서류를 보니 책 한권의 분량 안에 그분의 교직 40여년의 삶이 그대로 아름답게 축적되어있었습니다. 정말 가정생활, 직장생활, 신앙생활 전 분야에 걸쳐 열심히 부지런히 충실히 살아온 분이셨습니다. 현재의 세상과 학교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참 눈부시게 변화된 학교 현실이요 세상임을 실감했습니다. “아, 학교는 기업이 되어가고 학생은 상품이 되어가는 구나.” 제출 서류를 다 읽고 난 후 느낌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기보다는 철두철미 좋은 상품의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대학에서 초등학교까지 내려온 느낌이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나, 가난한 아이가 설 자리는 없어보였습니다. 오로지 아이들이 공부와 스펙 쌓기에 전념하다 보면 공동체의 이웃과 단절, 자연과의 단절, 삶과의 단절로 괴물이 되어가지 않겠나 하는 우려심도 들었습니다. 새삼 교회역할의 중요성을 통감했습니다. 아이들을 하느님 세계에로 창문을 내주어 참 자기를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교육, 공동체교육의 필요성입니다. 현재의 거대한 감옥처럼 보이는 아파트 주거 형태도 문제입니다. 예전과 같은 고유의 집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집은 우리의 몽상과 꿈을 지켜주는 하나의 우주'라는 데 이런 집 역할에 아파트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완전히 이웃과, 자연(흙)과 단절된 익명 속에 원자화된 괴물 인간을 만들어 가는 아파트 환경 안에서 역시 교회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 창문을 내줘야 삽니다. 이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