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30/11/2025===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오신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께로 가자!”
2025.11.30.대림 제1주일
이사2,1-5 로마13,11-14ㄱ 마태24,37-44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오신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께로 가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Happy new year to all!)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영어로 하니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시기를 라틴어로 <아드벤투스adventus>로 부릅니다.
그 뜻은 단순히 <오심coming>이라는 뜻입니다.
한자로는 <대림待臨;주님 임하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예전 외방전교회 문세화 신부님이 강의 도중 <임재臨在>란 말마디가 기막히게 좋다는 고백이 생각납니다.
이미 오셔서 함께 하시는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
바로 이것이 복음이요 대림시기의 기쁨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능가할 기쁨은 없습니다.
말그대로 설렘의 기쁨입니다. 주님 성탄의 오심만 있는게 아니라, 마지막 종말의 재림의 오심도 있고,
날마다의 오심도 있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뿐 아니라 수시로 필요할 때 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만이 아니라 하루하루 매일이 대림시기입니다.
제가 대림시기동안 늘 짧은기도로 부르는 오늘 아침기도 첫째 후렴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그날이 바로 대림시기 오늘입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대림초 하나가 주님께서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들고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은총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오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마치 죽음의 날을 아무도 모르듯이 말입니다.
어찌보면 대림시기는 깨어 있음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모르니 천만다행입니다. 마지막 주님 재림을 안다면 불안하고 두려워 아무일도 못할 것입니다.
모르기에 설레는 기쁨으로 늘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모두를 향한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려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정신없이 생각없이 주님을 잊고 자기를 잊고 욕망 따라 참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세대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절박한 질문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복음의 주님과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가,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답을 줍니다.
주님의 답입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둘의 내적 삶은 판이했던 것입니다.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구원받았지만, 생각없이 현세의 욕망에 매몰되어
주님도 나도 잊고 살았던 이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냥 이대로 생각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답은 다 하나, 바로 예수님이 주십니다.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처럼 오시는 주님이다.
도둑이 밤 몇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이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듯이 주님의 재림도, 죽음도 알 수가 없으니 늘 깨어 준비할 수 뿐이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처럼 죽음도 알 수 없기에 성 베네딕도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십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이어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깨어 살 것인지 그 구체적 처방을 주십니다.
바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을 회심으로 이끈 로마서 말씀입니다.
그대로 대림시기에 아주 적절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림시기 영적 전투에 돌입했음을 의미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품위 있게 깨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그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살라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과 더불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은 주님의 전사가 되어 영적전투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며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마중 나가는 적극적 삶입니다.
<오시는 주님>만 있는게 아니라 <주님께 나가는> 삶도 있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뻣노라.>
제가 11년전 2014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 여정시 주님의 집에 이르기까지 참 많이 불렀던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대림시기 참으로 살아 있는, 역동적인 시기입니다. 주님을 찾아 가서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 말씀이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의 집 성전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말씀과 더불어 주님의 평화를 배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로 가서 배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때 보다 깨어 배우고 공부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께 나아가는 대림시기입니다.
우리의 재판관이자 심판관이신 주님이 원하시는 바 영원한 평화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참 역동적인 대림시기, 평화의 전사가 되어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고,
깨어 준비하며 단정하고 품위 있게 살며, 또 주님께 나아가 부단히 말씀을 평화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대림시기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연민과 질투 모두 사람의 자연스런 본성이다. 그러니 질투와 맞서지 말고 질투하는 이들을 연민하라.”<다산>
“훌륭한 장사꾼은 재물을 깊이 감춰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덕을 갖춰도 겉모습은 모자라 보인다.”<사기>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고
세상 속에서의 영적전투 준비에 만전을 다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이요, 주님께 나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의 용기를 붇돋아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2,5).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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