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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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 == 1/5/2024 ===[(백) 노동자 성 요셉]

  2024년 5월 1일 수요일 [(백) 노동자 성 요셉] =============================== 오늘 전례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다. 목수였던 성인은 오늘날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제1독서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26─2,3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 == 1/5/2024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2024년 5월 1일 수요일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백) Wednesday of the Fifth Week of Easter] ==================================== 제1독서 <할례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5,1-6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3 이렇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선 이야기를 해 주어 모든 형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4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 사도들과 원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 몇이 나서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 복음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

김찬선 신부님의 복음 묵상 == 30/4/2024 === 환난 각오

  오늘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1 차 전도 여행을 끝내는 부분입니다 . 안티오키아에서 안수받고 선교를 떠난 그들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마지막까지 부지런히 여러 곳을 방문하고 ,  마지막까지 큰 환난을 겪습니다 .   이것을 보면서 저를 반성하게 됩니다 . 사실 제가 순회 공동체라는 것을 처음에 시도하게 된 것과 지금도 그 순회 공동체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물론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   말하자면 이분들의 선교 열성이 저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 저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것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   그래서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  생면부지 목포 북교동 본당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교회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는 곳에 보내달라고 하고 ,  무작정 자은도라는 섬에 갔으며 ,  비록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낮에는 같이 일하고 밤에는 신앙을 나누는 삶을 아주 보람되게 하였고 그런 시도가  10 여 년 계속되어 마침내 저희 수도회의 순회 공동체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   그런데 순회 선교는 장소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 내용 면에서도 그랬습니다 .   곧 한 가지 선교 활동을 줄곧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던 것을 두고 떠나는 것에 별 미련이 없었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실패를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겪게 될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   사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어려움이 많기 마련이지요 . 그러니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고 ,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 ...

이영근 신부 님의 복음 묵상 == 30/4/2024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평화의 두 단어가 있습니다.   ‘팍스’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의 주도 아래 주변국가들이 수동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로,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 곧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막강한 구력을 바탕으로 팍스 아메리카나 실현을 목표로 국제질서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을 불러오면서 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또 하나는 ‘샬롬’이 있는데,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하는 ‘샬롬’을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의 [4월 30일]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하느님의 뜻과 일치)

  -  하느님의 뜻과 일치  -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여러분의 양식이 되게 하십시오. 한걸음 더 나아가, 온유하게 받으십시오. 우리 하느님의 가장 거룩한 뜻을 여러분의 배우자로 받아들이십시오. 신앙의 반지를 끼고 매순간 거기에 여러분을 결합시키십시오. 그 안에 희망과 사랑의 모든 기쁨이 담겨져 있습니다.     [ 기도 ]   사랑하는 하느님, 당신의 뜻과 제 뜻이 결합되어서 둘 사이에 진정한 결합이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거룩한 영의 권능만이 이 결합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못할 것이 없으신 전능하신 당신을 믿습니다.     ‘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 ’   중에서   -  

함 승수 신부님의 복음 묵상 == 30/4/2024 === 요한 14,27-31ㄱ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14,27-31ㄱ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제국은 “로마의 평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강력한 힘으로 넓은 지역에 걸쳐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한 덕분에 분쟁이나 다툼이 발생하지 않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전하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힘으로 다른 이를 억누르고 억지로 굴복시켜 만든 일시적인 소강상태, 약한 자의 희생과 눈물로 강한 자만 ‘호의호식’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일 뿐이지요.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서로의 힘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 누구도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는, 어쩔 수 없이 유지되는 안정상태를 뜻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나뭇잎 하나가 연못 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듯, 그런 불완전한 고요나 안정은 작은 변수에도 쉽게 깨질 수 있기에, ‘평화’라는 고귀한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십니다. 세상은 그런 불완전한 고요나 안정을 ‘평화’라고 부르지만,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참된 평화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밖’에서 강한 힘으로 억눌러 억지로 만드는게 아니라, 내 ‘안’에 있으면서 나로하여금 욕심내고 집착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것들을 모조리 비워냄으로써 이르게 되는 일종의 ‘해탈’상태인 것이지요. ‘내 것’으로 여기며 집착하는게 없기에, 다시 말해 ‘잃을 것’이 없기에 무엇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 그런 담대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만 굳게 믿으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전적인 신뢰와 의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30/4/2024 ==떠남의 여정_

  -참 좋은 선물, 주님의 평화-     눈만 열리면,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루하루 날마다 배울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리하여 제 좋아하는 강론 주제중 하나가 ‘배움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일에 지치지 않아야 강론쓰는 것도 덜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승의 두 자질이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꼽으며 공자는 호학(好學)을, 배움을 좋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은 오늘 하루 잘 살아보라고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선물하십니다. 하루를 마칠때면 흐뭇하게 마치는 경우는 드물고 늘 아쉬움만 남듯 죽음앞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날은 하루하루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제 모 일간신문의 첫 사설은 우리나라 하루 42명이 자살한다는 기사였습니다. 얼마나 삶이 고달프고 절망적이었겠나 생각합니다. 출산율은 꼴지인 나라가 자살율은 1위이니 참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삶은 떠남의 여정이요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오늘 4월 30일이 끝나면 내일부터는 계속되는 파스카 시기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성모성월의 시작이요 행사도 유난히 많은 5월입니다. 아마 스승의 날 전후로는 50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도 저를 찾을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끝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마지막 죽음의 떠남도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잘 떠남의 죽음은 없습니다. 정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떠남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어제 밤에 받은 연미사를 부탁하는 이름이 특이하여 자매에게 물었더니 시할머니 이름이라 하여, “시할머니 이름까지 기억하여 연미사를 봉헌하니 참 대단하십니다.” 답신을 드렸습니다. 시할머니가 잘 살다 잘 떠난분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보낸 내용도 삶을 뒤돌아보게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