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10의 게시물 표시

만남의 길 위에서 - 이해인

만남의 길 위에서 - 이해인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제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아름다운 축복이며 의미 있는 선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정 당신과의 만남으로 저의 삶은 새로운 노래로 피어오르며 이웃과의 만남이 피워 내는 새로운 꽃들이 저의 정원에 가득함을 감사드립니다 만남의 길 위에서 가장 곁에 있는 저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함께 하는 벗과 친지들을 그리워하며 저의 편견과 불친절과 무관심으로 어느새 멀어져 간 이웃들을 뉘우침의 눈물 속에 기억합니다 깊게 뿌리내리는 만남이든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든지 모든 만남은 제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며 인생의 사계절을 가르쳐 주는 지혜서입니다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모습들만큼이나 다양하게 열려 오는 만남의 길 위에서 사랑과 인내와 정성을 다하신 주님 나무랄 데 없는 의인뿐 아니라 가장 멸시받는 죄인들에게조차 성급한 판단과 처벌의 돌팔매질보다는 자비와 연민으로 다가가셨던 주님 당신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일에서도 늘 계산이 앞서고 까다롭게 따지려드는 저의 옹졸함이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판단하고 늘상 이웃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기적인 태도로 슬픔과 상처를 이웃에게 더 많이 주었으며 용서하는 일에는 굼뜨기 그지없었음을 용서하십시오 때로는 만남에서 오는 축복보다 작은 근심과 두려움을 더 많이 헤아리며 남을 의심하는 겁쟁이임을 용서하십시오 앞으로도 멀리 가야 할 만남의 길 위에서 저의 비겁한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당신처럼 겸허하고 자유로운 기쁨의 순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반갑고 기쁘게 다가오는 만남뿐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런 만남까지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깊고 높은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저는 비록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좋은 사람으로 좋은 만남을 이루며 살고 싶습니다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맑게 흐르는 주님의 바다를 향해 저도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며 쉬임 없이 흘...

큰 돌, 작은 돌

큰 돌, 작은 돌 우리 삶은 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와 같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몇 안 되는 큰 돌, 즉 중요한 것은 소중하게 여기고 작은 돌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돌이 없다면 우리 진리의 그림은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없다. - 폴커 초츠의《카마수트라, 인생에 답하다》중에서 - 우리는 대체로 크기와 부피로 평가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크기나 부피에 있지 않다. 큰 돌도 필요하다. 그러나 작은 돌이 곳곳에서 빛을 내야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큰 돌 틈새에서 환하게 빛나는 작은 돌을 우리는 보석이라 부른다. * 좋은글 중에서 *

내가 알게 된 참 겸손

책을 읽다가 '겸손은 땅이다.'라는대목에 눈길이 멈췄습니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습니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밟히고, 눌리고, 다져지고, 아픈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맺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습니다.   -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

엄마, 저는요 / sr.이해인

엄마, 저는요 / sr.이해인 새해 첫날 엄마가   저의 방에 걸어 준   고운 꽃달력을 볼 때처럼   늘 첫 희망과 첫 설레임이 피어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첫눈이 많이 내린 날   다투었던 친구와 화해한 뒤   손 잡고 길을 가던 때처럼   늘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엄마, 저는요   장독대를 손질하며   콧노래를 부르시고   꽃밭을 가꾸시다   푸른 하늘 올려다보시는   엄마의 그 모습처럼   늘 부지런하면서도 여유 있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충만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0.23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에페4,7-16 루카13,1-9 "충만한 삶" 내려오셨던 그 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이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자 이 은혜로운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충만한 삶이요 성숙한 사람입니다. 어제 잠시 농장에서 야콘 캔 것들을 컨테이너에 담으면서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네.’ 저절로 탄식처럼 나온 말입니다. 작고 갈라터지고 상처 입고 정말 온전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순간 하느님께서 마지막 인생들 수확 때 ‘아, 제대로 된 사람이 별로 없네.’ 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고맙게도 저절로 나오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 말에 수사님들은 이구동성으로 흙에 원인을 돌렸습니다. 흙이 좋아야 열매도 좋은 데 흙이 좋지 않아 열매도 불실하다는 너무 자명한 진리의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흙이 좋아도 날씨가 맞지 않으면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흙과 하늘이 제대로 만나야 풍성한 수확이듯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제대로 만나야 충만한 인생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정성을 다할 때 하느님을 움직이고 운명을 바꿉니다. 진인사 대천명입니다. 노력을 다하고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회개의 삶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제대로 된 인생’을 살기위한 항구한 노력입니다. 좋은 삶,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입니다. 삶이, 사람이 좋아야 언행의 열매도 좋습니다. 하여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

"기도해야 삽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0.24 연중 제30주일(전교주일) 집회35,15ㄴ-17,20-22ㄴ 2티모4,6-8.16-18 루카18,9-14           "기도해야 삽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 마음에 와 닿은 지혜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기 마련이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는 멸망의 독소가 없고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덕스러운 자들은 지혜를 모르며 의인은 죽지 않는다.”(지혜1,14-15).   이래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의인들은 죽지 않으며 지옥은 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어제 휴게 시간에 어느 수사님과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작년보다 야콘 수확이 많이 줄었지요"   “날씨 탓이 큽니다.   농사는 90%가 하느님 손에 10%는 사람 손에 달려있다고 봐야 합니다.”   어느 분은 하느님 은총과 사람의 노력을 80%대 20%로 잡기도 하는데 대동소이합니다. 농사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공동체 삶도 하느님 은총과 사람 노력이 80%대 20%입니다. 이를 깨달아 알 때 참된 겸손이요 맑은 영혼의 눈입니다. 하여 기도입니다. 80%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80%의 하느님을 까맣게 있고 있으며 80%의 자리에 탐욕의 돈 우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상실의 하느님 중심의 중세시대를 암흑시대라 하는데 하느님과 인간 상실의 물질 만능의 오늘날 역시 현대의 암흑시대, 문명의 야만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강을 죽이고 기름진 농토를 없애는 4대강 공사를 강행할 리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본래의 하느님 자리 80%를 ...

"빛의 자녀답게"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0.25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에페4,32-5,8 루카13,10-17           "빛의 자녀답게"       ‘인간답게’산다는 것은 애매모호합니다. ‘자녀답게’ 산다는 것이 아주 또렷하고 구체적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생명이자 빛이신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막 살 지는 못할 것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 때 비로소 자유인입니다. 주님은 사도 바오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자녀답게 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하느님 없는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닙니다. 결국 세상의 종으로, 노예로 전락합니다. 자유로울 때 행복합니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 하여 행복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아침 성무일도 시 시편 두 구절이 생각납니다.   “주여, 당신의 종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시고,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살려주소서.”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마음이자 자유를 찾는 마음입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 심겨진 하느님을, 자유를 찾는 갈망이요 이런 면에서 누구나 수도자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때 비로소 치유와 구원입니다. 자유와 행복입니다. 바로 주님의 얼굴을 뵙는 이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주여 찬미 받으소서. 주는 당신 백성을 찾아 해방시키셨도다.”   아침 성무일도 즈카리야 후렴 말씀은 오늘 복음을 요약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자 동시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18년 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