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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행복해지는 글

아침에 행복해지는 글 "오늘"이란 말은 싱그러운 꽃처럼 풋풋하고 생동감을 안겨줍니다 마치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마시는 한모금의 시원한 샘물 같은 신선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고 오늘 할 일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하루를 설계하는 사람의 모습은 한 송이 꽃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그 사람의 가슴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오늘 또한 어제와 같고 내일 또한 오늘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미련이나 바람은 어디로 가고 매일 매일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은 결코 살아 있는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처럼 쓸쓸한 여운만 그림자처럼 붙박여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오늘’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미래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운 일들로 발목을 잡는다해도 그 사슬에 매여 결코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지혜와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요. 오늘이 나를 외면하고 자꾸만 멀리 멀리 달아나려 해도 그 "오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밝은 내일이란 그림의 떡과 같고 또 그런 사람에게 오늘이란 시간은 희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사무엘 존슨은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서 더욱 짧아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시간을 헛되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늘 새로운 모습으로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늘 공평하게 찾아오는 삶의 원칙이 바로 "오늘" 이니까요 -아침에 행복해지는 글 중에서-

홈이 없는 이유(박성철, ‘달콤한 나의 인생’ 중에서)

홈이 없는 이유(박성철, ‘달콤한 나의 인생’ 중에서) 얼마 전 고급 나무에 도장을 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도장에 파인 작은 홈이 없습니다. 작은 홈은 정면을 표시해 주는 것이기에 그것이 없으면 도장의 밑부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불편했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주문했는데 이런 표시도 해 두지 않은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았고, 이유를 안 후 ‘아하!’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고급 도장에는 정면을 알 수 있는 작은 홈을 파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합니다. 그런 도장을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정면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으면 바로 찍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홈을 파 두지 않아 도장의 정면을 찾는 시간 동안 더 깊이 자신의 결정을 생각하게끔 한다는 의도가 숨은 것이라고 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라는 교훈이 도장에 담긴 것입니다.

비워내는 마음 낮추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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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내는 마음 낮추는 마음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 내 마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입니다. 높아지기보다는 낮아질 때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마음이 낮아지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 내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다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복잡할 때 보다 단순해질 때 마음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생각이 단순해지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 내 마음이 부유해지기보다는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유해질 때보다 가난해 질 때 마음이 윤택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마음을 비워 내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 나의 자랑할 것을 찾기보다 나의 부끄러움을 찾는 것입니다. 나를 자랑하기 보다 나를 부끄러워 할 때 내 삶이 아름다워 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내 부끄러움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 기쁨보다 슬픔을 더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기쁨은 즐거움만 주지만 슬픔은 나를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나는 슬픔이 올 때 그것을 내 인생의 성숙의 기회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의 기도보다 용서의 기도를 먼저 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정용철님 "가슴에 남는 느낌 하나" 중에서 -

작은 영혼이 되려면

네 이웃들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느냐?   악을 선으로 갚느냐?   다른 사람들의 소원을 앞질러서 그들을 도와주느냐?   누가 네게 나쁜일을 하면 거기에 대해원한을 품지 않느냐   너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바치려 노력하느냐   모든 것을 너의 자아로 귀결시키지 않느냐?   네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리니냐?   네가 내 손안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느끼느냐?   네가 받는 모든 것에서 네 하느님께 돌아갈 몫을 그분께 드릴줄 아느냐?   기쁠때나 괴로울때나 하느님 고맙습니다 말할줄 아느냐?   너를 하느님 품안에 맡길줄 아느냐?   너보다 덜가진 사람들에게 줄줄을 아느냐?   그렇다면 정말 네가 내 지극히 거룩한 마음의 사랑하는 작은 영혼이다   예수님께서 마가르따에게 내린 메세지  

최선을 다했을 때는 실패한 것이 아님.

최선을 다했을 때는 실패한 것이 아님. 성공했을 경우에 그들은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려야 하고 반면에 그들이 최선을 다했을 경우에는 실패가 있어도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만일 한 자매가 활동 중에 실패하는 일이 생길 경우에 우리는 그녀가 머리가 나쁘다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따위 의 모든 인간적인 약점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최선을 다했을 때에는 하느님의 눈에는 그녀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마더 데레사-

<영적 삶이 성숙할수록>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루카 9,18-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영적 삶이 성숙할수록>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진리를 간결한 한 마디 진술로 요약하고 계십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삶이 성숙할수록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는데서 오는 기쁨, 보람, 행복, 위로는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단맛들은 ‘이것’을 넘어서고 나서야 찾아오는데, ‘이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작은 죽음, 매일의 순교, 순간순간 나를 버림,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한 긍정적 수용...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내게 맡겨진 몫을 다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영성적 성숙의 결과는 겸손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영적 완성의 시작은 하느님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

침묵과 고독은 기도의 준비이며 기초

침묵과 고독은 기도의 준비이며 기초   침묵과 고독은 기도를 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서 대화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떼어 내어야 합니다. 침묵에는 외적 침묵과 내적침묵이 있습니다. 외적 침묵은 보는것, 듣는 것 등 우리의 오관을 삼가는 것이고, 예를 들어 신문, 텔레비젼, 영화나 비디오 또는 잡지 등을 절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적 침묵은 마음의 겸손과 온유함을 가지고 모욕을 잘 참아받고 극기하며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온갖 탐욕과 욕심, 분노, 미워하는 마음 등을 끊어 버리고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 (마태6,21)고 하신 것은 우리의 마음은 하나 이므로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쾌락에 있다면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질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참된 보화이신 하 느님께 있다면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재물이나 명예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들이라고 착각 하기 때문입니다.   -묵상기도와 성체조배 중에서-

♡ 기쁨의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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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의 기도 ♡ 기쁨이 기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러려면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기쁨을 인정하고 감사하면 그 기쁨은 어느덧 기도로 변하여 흔들림이 없습니다.   -「지금 행복하세요?」中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

9월 26일 연중 제26주일-루카 16장 19-31절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         주변을 살펴보면 라자로 못지않게 참혹한 고통을 하루하루 견뎌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찢어질 듯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 선천적 장애로 인한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고통,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 한번 나름대로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보지만 꼬이기만 하는 인생으로 인한 고통...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고통, 좀 잔잔해졌나 싶으면 또 다시 엄습해오는 고통, 도대체 고통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왜 고통은 끊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인류 역사상 고통은 우리 인간 모두의 ‘화두’였고, 대화의 단골주제였고,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삶과 분리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절대로 분리시킬 수 없었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장 22절)       오늘도 고통은 우리에게 한 가지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탐구’입니다. ‘고통의 구원적 의미의 이해’입니다.       다행히 고통이란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에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신 분이 계십...

"주님을 섬기는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1코린15,12-20 루카8,1-3             "주님을 섬기는 기쁨"       오늘 복음의 끝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던 무수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우리 수도원 역시 여러 자매들의 모임이 있어 주님을 섬기듯이 수도원에 사는 우리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제나 수도자를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들 중심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자매들입니다. 하여 저절로 주님을 섬기는, 주님께 시중드는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분도 수도원만이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여인들의 공동체 역시 주님을 섬기는 학원 공동체입니다. 이런 자매들의 정성어린 시중 덕분에 초대 교회이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주님의 교회공동체였습니다. 주님께 은혜와 사랑의 체험이 깊을수록 그에 대한 보답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 역시 열렬해지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행복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섬길 대상을 찾지 못해 영적으로 방황하는 무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섬길 유일한 분은, 우리의 영원한 참 비전은 주님 한 분 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영원한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 전력을 다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영원한 비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였고, 그 그리스도를 섬기고 선포하는 데 온 힘을 다한 사도 바오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

"바르고 착한 마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18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1코린15,35-37.42-49 루카8,4-15             "바르고 착한 마음"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농사의 성패는 흙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씨가 좋아도 흙이 좋지 않으면 좋은 씨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말씀의 좋은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 밭이 문제입니다. 타고난 좋은 마음 밭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수행으로 가꾸고 돌봐야 좋은 마음 밭입니다. 방심하면 방치하면 그 좋은 밭도 돌밭이, 잡초 밭이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마음 밭은 어떤 상태인지요.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은 사람이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인내로써 열매 풍성한 인생일 때 성공인생입니다. 믿음의 열매, 사랑의 열매, 희망의 열매입니다. 평생 말씀 농사에 바르고 착한 마음과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주님의 복된 부활에 참여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명쾌히 밝히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이게 바로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내다봅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이나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세례성사로 인해 이미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19 연중 제25주일 티모8,4-7 1티모2,1-8 루카16,1-13             "하느님 중심의 삶"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삶에 두 중심을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꼴이, 인품이, 인격이 형성됩니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삶을 원하십니까?   복음의 영리한 청지기처럼 하느님을 섬기는데 민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관계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합니다. 작은 일에도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성실한 사람이 큰일에도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충실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하나일 뿐입니다. 하느님 아닌 그 무엇도 이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돈이, 재물이 이 하느님 중심 자리를 차지해선 안 됩니다. 예언자 아모스가 질타하는 이들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가난한 이들을 망하게 하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다짐입니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반면 사도 바오로가 권고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 하느님을 중심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중심한 삶일 때 진정 품위 있고 고귀한, 자유로운 삶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

"순교적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20 월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지혜3,1-9 로마8,31ㄴ-39 루카9,23-26         "순교적 삶"       진정 강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어디서나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입니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한 이들을 끝까지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의인입니다. 이런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아무도 다치지 못합니다. 이들은 어떤 환경 안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늘 읽어도 감격적인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게 영혼의 승리요 주님과 일치된 삶의 증거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사랑이, 신뢰가 깊어질수록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순교적 삶은 거창하거나 요란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내 삶의 자리에서 도피하지...

"성숙한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21 성 마태오 복음 사가 축일 에페4,1-7.11-13 마태9,9-13         "성숙한 사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병자임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은, 영육으로 병자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건강한 자가 아닌 병자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자신이 죄인임을, 병자임을 자각할 때 주님처럼 이웃에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죄인이자 병자인 우리 모두를 성숙의 길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 말고 치유와 구원의 길은, 성숙의 길은 없습니다. 매일 끊임없이 주님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이게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노력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일치에의 참여가 바로 치유이자 구원이자 성숙입니다.   희망도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하나에의 참여가 깊어질수록 성숙이요 자비로운 삶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22 수요일 한가위 요엘2,22-24.26abc 묵시14,13-16 루카12,15-21           "하느님"       오늘 민족의 최고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슬기로웠던 우리 조상들은 결코 하늘(하느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 믿음이 계속 전래되었음을 봅니다. 역시 오늘 강론의 주제는 하느님이며 말씀 중 몇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너희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탐욕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탐욕에 완전히 눈먼 사람입니다.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탐욕이요 지혜롭게 만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자들이 정말 지혜롭습니다.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살 때 환상은 걷혀 지금 여기서 부유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날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을 떠남에서,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 탐욕에 노예 된 삶에서 기인하는 온갖 불행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자들이 진정 부자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양할 때 샘솟는 기쁨입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 안...

"주님은 나의 빛(The Lord is my life)"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9.23 목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1887-1968)기념일 코헬1,2-11 루카9,7-9         "주님은 나의 빛(The Lord is my life)"       삶의 허무를 통과해야 진정한 삶입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허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삶을 무의미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허무감입니다. 코헬렛의 첫 일성이 가슴을 시리게 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허무입니다. 허무의 어둠이 스며들면서 사라지는 희망의 빛입니다.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활동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 중심을 못 잡고 있는 헤로데 영주의 내면은 그대로 혼돈의 어둠입니다. 신념 부재의 내면을, 중심 없이 허무주의의 포로가 되어 사는 그의 삶을 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주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마음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언제나 함께할 때 사라지는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입니다. 어제 영어로 된 저녁 성무일도의 찬미가와 첫 후렴을 보면서 느낀 확신입니다. 다음 아름다운 찬미가를 소개합니다. 아마 4-5세기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바쳤던 찬미가 인 듯합니다.       “그리스도 어느 쪽 손이든 가까이 계시네.   그리스도 내 뒤에, 앞에 서계시네.   그리스도 나 어디로 가든 나와 함께 계시네.   그리스도 주위에, 위로, 아래로 계시네.       그리스도 내 마음 안에 내 정신 안에 계시네.   그리스도 내 영혼의 신전 안에 모셔져 있네.   그리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