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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1/1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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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1/10/2024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24년 10월 1일 화요일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백) Memorial of Saint Therese of the Child Jesus, virgin and doctor of the Church] ===================================================== 오늘 전례 ‘소화(小花) 데레사’로 알려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1888년 열다섯 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결핵을 앓다가 1897년 스물네 살에 세상을 떠났다. 비록 수도 생활은 짧았지만 그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고 고행했으며,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였다. 그는 죄인들의 회개와,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표된 병상 저서들은 세계 곳곳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께서 그를 시성하시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으며, 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셨다. 제1독서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

양승국 신부님의 복음 묵상 ==30/9/2024 ===걱정이나 근심, 유혹이 다가올때면 즉시 성경을!

언젠가 진심으로 성경에 매료되어 목숨 걸고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교구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런저런 성경 공부 과정을 빼놓지 않고 수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2년 과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평생토록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죽기살기로 일하셨으니,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운동도 나가시고, 좀 여유있게 지내시면 좋을텐데, 어찌 그리 성경을 파고드십니까?” 형제님 왈, “그동안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천지를 헤매다녔지만 찾지 못했는데, 성경 안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유혹과 갈등을 떨치는 데는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놀았습니다. 이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도 빠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무너져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며 은둔 수도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세속의 유혹은 수시로 떠올라 예로니모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로니모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유혹은 예로니모를 흔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번역하고 연구하고, 그것이 그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온 종일 성경 번역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 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

이영근 신부 님의 복음 묵상 == 30/9/2024=='진정한 큰 사람'

  <'진정한 큰 사람'>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 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 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 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 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30/9/2024 ===사랑의 찬미

  “경천애인(敬天愛人)”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 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교황님의 제46차 해외 사목 방문중 루벵 학생들에게 한 감동적인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추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공부는 권력의 도구가,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나가라. 이념들의 이분법에 들어가지 마라.”   엊그제 수도원 ‘자캐오의 집’, 피정집에서 단체 피정지도중 제의방에서 불암산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나온 고백에 행복했습니다. 흡사 주님 앞에 서있는 듯 행복한 체험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8.>   당분간 10월은 이 시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지인에게 시화(詩畫)를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가장 불암산 바라보기에 전망좋은 ‘자캐의 집’ 3층에서 탄생된 시입니다. 아마도 성인들 역시 주님 앞에서 늘 사랑의 찬미에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역시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의 시작입니다. 욥기 역시 앞서의 코헬렛 못지 않게 깊고 아름답습니다. 욥의 시련에 앞서 똑같은 그에 대한 묘사가 2회 나옵니다.   ‘그 사람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하느님도 인정한 욥이었고 시련에 앞서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고, 사탄은 이의를 제기하자 하느님은 사탄의 제의를 수락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

함 승수 신부님의 복음 묵상 == 30/9/2024 = 루카 9,46-50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 루카 9,46-50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이 지위가 높아지면 어려울 때 일을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잘난 듯이 뽐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지요. 부모는 자녀가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그러려니’하고 이해합니다. 자신도 어린 아이였던 시절 그와 비슷한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었고, 자기 부모님이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셨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든 것이 부족하고 서툴렀던 ‘올챙이 시절’을 거쳐 어엿한 어른이 되었기에, 지금 그 올챙이 시절을 겪고 있는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개구리’가 되었다고 해서 자녀를 개구리의 기준으로 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작아짐으로써 자녀와 똑같은 올챙이의 눈높이로 그들을 바라보기에, 그들이 부족하고 약해서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입니다. 예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만해도 정말 보잘 것 없던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조금 성장했다고 우쭐해져서는, 서로 ‘내가 더 잘났네’하며 되지도 않는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이 곧 도래할 거 같으니, 거기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가 하느님 나라에 기여한 바가 더 큰지를 따져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진짜 열을 올리며 집중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어린이’를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0/9/2024==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2024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전에는 여행을 참 많이 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의 세상을 확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삶의 확장이 아닌 삶의 축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행 중의 경험은 힘들고 불편할 뿐입니다.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나의 모습은 작아집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삶이 축소되었을 때,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단순히 낭만, 예술, 아름다움 등을 찾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자기가 주체이니 원의만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처럼 하겠다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힘듦과 불편함을 없게 하겠다고 옷만 가방 25kg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도 탈 수 없습니다(비행기 수화물 25kg 이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여행자입니다. 언젠가는 여행을 마치고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작은 내가 되어, 훌쩍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이 됩니다. 불편함과 힘듦도 여행자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서 작은 존재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들이 서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랍비신학에서는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눈 것, 꿈란 공동체에서도 확고한 서열이 정...

반 신부의 복음 묵상 =30/9/2024=겸손한 마음

  연중 제26주간 월요일(루카 9,46-50)   겸손한 마음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30/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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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30/9/2024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2024년 9월 30일 월요일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백) Memorial of Saint Jerome, Priest and Doctor of the Church] ======================================= 오늘 전례 예로니모 성인은 347년 무렵 달마티아의 스트리돈(현재 보스니아의 그라호보 근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공부한 다음 트리어에서 정부 관리로 일하였으나,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379년 사제가 되어 382년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는데,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가 그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성경 주해를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베들레헴에서 세상을 떠났다.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제1독서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욥기의 말씀입니다.1,6-22 6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9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