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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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 1/4/2024(매일미사) =[(백)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2024년 4월 1일 월요일 [(백)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백) Monday in the Octave of Easter] =================================== 제1독서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14.22-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영근 신부 님의 복음 묵상 == 31/3/2024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입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다 같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주간 첫날 새벽에 발생한 일을 전해줍니다. 곧 막달레나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제일 먼저 첫 번째로 본 것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를 시사해주는 첫 번째 표상입니다.  그렇다면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실 부활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닫혀 있든지 막혀 있든지 상관없이 드나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간 첫날 저녁에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는 데도 들어오셨습니다(요한 20,19).   그러니 돌이 치워진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빈 무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을 치워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돌’, 주님의 은총과 사랑과 용서를 나눌 수 없도록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돌’, 우리 자신을 짓누르고 무겁게 만드는 ‘돌’,  바로 그 ‘돌’을 치워내어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31/3/2024 ===“축하합니다!”

  -예수님 부활 만세, 우리들 부활 만세-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축하합니다! 예수님 부활, 우리들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기쁜 소식은,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일 4월1일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이제 참 멋지고 황홀한 부활시기 4월을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24.1)   오늘 부활 대축일 낮기도 시편 화답송 후렴도 참 적절합니다. 어제 부활 성야 미사도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1.빛의전례, 2.말씀전례, 3.세례전례, 4.성찬전례” 네부분으로 이뤄진 전례로 새삼 세례전례가 부활성야미사의 중심임을 깨달았습니다. 수도원 개원후 최초로 장차 입회가 예정되는 이종원 베네딕도 형제가 공동체의 특별한 배려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 모두가 세례 서약 갱신에 참여함으로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말씀전례 7개의 독서에 이어, 복음전 로마서 독서는 아랫집 저와 띠 동갑인 우리 나이로 88세 노령의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서 마리레몽 수녀”가 또박또박 낭낭한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이 또한 신선한 감동에 충격이었습니다. 수녀님 역시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하였음을 입증합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부활 축하드리며 주님의 크신 평화가 가득하시길 빕니다!! 기쁜 축제의 날, 어린양의 파스카, 승리의 날, 감사와 기쁨의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디지털 스마트폰 카톡의 시대, 유일하게 초코렛 ...

함 승수 신부님의 복음 묵상 == 31/3/2024 === 요한 20,1-9 “보고 믿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요한 20,1-9 “보고 믿었다.“         주님 부활의 이야기는 날이 밝기 전, 아직 어두울 때에 시작됩니다.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어둠’은 단순히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과 탐욕, 위선과 폭력이 여전히 남아있는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희망적 사건이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180도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그분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 역시 여전히 힘들고, 괴롭고, 두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달라진 게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어둠 속에 희망의 ‘빛’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그 빛을 발견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그 빛을 알아보려면 믿음으로 열린 눈이 필요하지요.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관점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지 그 답을 찾을 겁니다.   첫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녀는 예수님을 여읜 슬픔 속에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즉 그녀의 시선은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시신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안식일 때문에 시간에 쫓겨 사랑하는 스승님의 시신을 제대로 염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주간 첫날 새벽 아직 해가 뜨기도 전부터 그분의 무덤을 찾아가지요. 그리고 거기서 주님의 무덤을 막아놓았던 큰 돌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블레포”(blépein)로서 대상을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한 번 슥하고 훑어보는 무덤덤한 ‘봄’을 의미합니다. 즉 그녀는 아직 날이 어두워 시야가 흐릿한 상황에서 무덤 입구에 있던 돌이 치워져 있는 외적인 상황을 확인하는데에 그친 겁니다. 물론 날도 어둡고 연약한 여인 혼자인데다가 생각지도 못한 큰 일에 놀라기까지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1/3/2024===오늘은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2024년 3월 3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오늘은 전례 주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내신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하리라는 큰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기쁨으로 오늘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강론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불행을 함께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일까요?” 불행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해 주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이 됨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불행을 함께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랫동안 일이 풀리지 않아 고생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힘들어하는 친구와 함께하면서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박이 난 것입니다. 사업이 잘 풀리면서 경제적 여유와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변에 함께해 준 친구들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친구들이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친구가 돈 벌더니 변했어.” 친구들에게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너 돈 자랑하는 거니?” 하면서 인상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불행을 함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기란 정말 힘듭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월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우월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시기와 질투가 작동하면서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보다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쁨에 함께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할까요?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이날에 더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부활의 기쁨을 나의 이웃들에게도 알려...

반 신부의 복음 묵상 =31/3/2024==진리 안에 자유로운 삶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20, 1-9)   진리 안에 자유로운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도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충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에서 매 순간 다시 살아나길 희망하며 부활의 삶을 자유라는 측면에서 묵상하는 가운데 깨우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이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사람됨을 확인 받게 됩니다. 창세기말씀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피조물’로써의 존재 조건을 깨뜨렸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곧 물고기가 뭍으로 뛰어나온 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유를 왜곡, 남용하여 피조물의 존재성을 거부하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은 죄의 노예 상태로 살게 되었고 오히려 부자유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짓이나 악을 선택하면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후회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면 자유가 아닌 속박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 모르지만 영원히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진리 안에 머물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매번 강론을 길게 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강론을 시작하면 아예 눈을 감고 쉬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습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깜박 졸고 있던 신자분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정말 질립니다. 질리고말고요!” 진리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