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5의 게시물 표시

어떤 사랑을 합니까? - 좋은글

어떤 사랑을 합니까? 어느 미국의 사회학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볼티모어에 있는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그곳 청소년들 200명을 만나 생활환경을 조사해 보고 그들의 25년 후 모습을 전망하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조사를 마친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평가서를 작성했습니다. ‘이곳의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차별을 받으며 아무런 배움의 기회도 주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가 전혀 없다.’ 그 뒤 25년이 지난 후, 다른 사회학 교수가 이 연구 조사를 우연히 접하면서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그때의 청소년들이 지금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망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20명을 제외한 180명 중에서 176명이 변호사와 의사와 사업가 등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한결같이 “스테파노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라는 답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스테파노라는 여선생님을 찾아가 어떤 교육을 해서 빈민가 청소년들이 성공할 수 있는 인생으로 이끌 수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저는 그저 아이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희망’이라는 작은 겨자씨 한 개씩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주었지요.” 사랑을 통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랑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나만을 사랑하고,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변화가 아닌 더 어렵고 힘든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변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 나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이 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2015.11.4. 수요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1538-1584) 기념일 로마13,8-10 루카14,25-33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사랑과 자유는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자유롭고 자유로울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과 자유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사랑하여 자유로울수록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제자직의 우선적 출발점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버리고 비우는 삶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직에 대한 요구가 철저하고 비타협적이라 충격입니다.  첫째, 주님의 제자는 모두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도 항구한 우선적 사랑이 성소의 잣대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에 대한,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수 있습니다.  주님도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실제 그대로 미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보다 누구도 더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 때 저절로 모든 사람에 대한 무집착의 사랑입니다.  역설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 아가페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바로 1독서 로마서가 말하는 ...

지체를 위한 지체, 사랑을 위한 은사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로마 12,5)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론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 말씀을 새겨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점만을 생각했는데 지체들끼리도 서로서로 지체라는 것입니다. 지체인 눈이 멀면 지체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 전체가 어두워지고 발도 고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발이 안 좋으면 몸 전체가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눈도 아름다운 가을풍경을 보러갈 수 없겠지요. 그제 마라톤을 뛰었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마라톤을 뛸 때마다 감동적인 인간승리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시각장애인의 마라톤 도전입니다. 이번에도 시각장애인 여러분이 도전을 하였는데 그 옆에는 항상 장애인의 눈을 대신해주는 ‘Happy Leg’라는 도우미들이 있습니다. 뛸 수 없는 장애인들을 뛰게 하는 행복한 발들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마라톤을 보면서 눈이 멀쩡한 사람도 겁내는 마라톤에 이들은 왜 도전을 하고, 도우미들은 왜 돕는지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우선 시각장애인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볼 수 없는 장애 그 자체 때문에 다른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레 많은 것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움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곤 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어떻게 가고, 어떤 위험이 눈앞에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발걸음을 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의 마라톤은 보지 못하니 뛸 수 없다는 그 부정적인 생각을 뛰어넘겠다는 도전이요, 무엇보다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마음의 장애인 두려움에 대한 도전이며 이 도전을 통해서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을 이겨낸 인간 승리인 겁니다. 그러나 이들이 승리한 것이지만 도우미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뭘 하고파도 도전의지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도전의지가 강하게 있더라도 승리할 수 ...

하느님 안에 닻을 내려라!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강론글

†찬미예수님 우리들이 ‘어제 많이 쉬었는데....’ ‘쉬어야 하는데...’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요? 이 쉰다고 하는 게 뭡니까? 쉰다는 것이 몸둥아리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혼자 어디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이 쉬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 찌들어 있으니까 “너희들 어찌 쓰러질 것 같으니 가서 좀 쉬자!” 우리 신자들이 쉰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Resting God!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그 힘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허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병고에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육신입니다. 젊었을 때는 펄~펄~ 날던 사람도...운동을 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風을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고 침을 질질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저 황소 같던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인간의 육신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 나약해 집니다. 그 나약함은 사제건 수도자건 평신도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80이 된 어느 노사제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대화중에 “내가 옛날 혈기왕성할 때에는 자신 있었어.... 내 아무리 늙어서 8~90이 되어도 흐트러짐 없이 이 모양 이대로 꼿꼿하게 약한 모습 안 보이고 살다가 잠자듯이 갈거야..... 이렇게 자신 있었는데 이제 환경의 영향, 육신의 영향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네~~” 그분과 묵주기도를 같이 하는데 꼬박꼬박 조시는 겁니다. 마음의 중심에 영적으로 살리라 다짐했지만, 80 노사제는 묵주기도 5단을 끝내지도 못할 정도로 그 몸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사제생활을 오랫동안 하신 분도 환경 앞에서 여전히 약합니다. 암에 걸린 어느 수녀님을 방문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본당에서 같이 계셨던 분이신데 제가 병들어 있을 때 저를 위해 호박물도 내려다 주고 약초를 뜯어 즙도 내어주고 정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