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삶에 대한 긍정적 믿음> -좋은 글-

< 삶에 대한 긍정적 믿음 > - 좋은 글 -     힘드신가요 ?   3 일만 기다려봅시다 .   기도하면서 …       미국을 방문한 한 중국 여류작가가   뉴욕의 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   할머니는 남루한 옷 차림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나약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       여류작가는 꽃을 고르며 할머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       " 할머니 ,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       그러자 할머니는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 왜 즐겁지 않겠어요 .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       여류작가는 다시 물었습니다 .       " 번뇌에 대해 마음 편히 생각하시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군요 ."       그러자 할머니는 여류작가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       "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픈 하루였죠 .   그런데 사흘 후 부활하지 않았나요 ?   그래서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물 한 어머니가 처음으로 학부모 회의에 참석했을 때 유치원 교사가 말해주었다. "아드님한테 다동증(多動症) 증상이 있는 것 같아요. 자리에 앉아서 채 3분도 견디지 못하는 걸요.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좋을것 같네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오늘 선생님이 엄마한테 무슨 얘기 했어?"   순간 어머니는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솟구쳤다. 반 아이40명 가운데 유독 자기 아들만 선생님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우리 아들을 칭찬하시더구나. 단 1분도 자리에 앉아있질 못하던 애가 지금은 3분 동안이나 견딘다고 말이야. 다른 애 엄마들도 모두 부러워하더구나. 반 아이들 가운데 우리아들이 제일 조숙하다고."   그날 저녁, 아들은 평소와 다르게 어머니가 일일이 먹여주지 않고도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 아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부모 회의에서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번 수학 시험에서 아드님은 전체 학생 50명 가운데 겨우40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혹시 아드님의 지능지수가 낮은 게 아닌가 의심되네요." 교실을 나서면서 어머니는 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집으로돌아와 식탁에 마주 앉은 아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무척 기특해하더구나. 워낙 머리가 좋아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네 옆 단짝 정도는 이길 수 있겠다더구나. 그 아인 이번에 겨우 21등을 했다면서?"   그 말에 아들의 눈에는 금세 정기가 감돌았다.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졌으며, 이튿날엔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갔다. 아들이 커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학부모회의에 참석한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호명하기만 기다렸다. ...

생각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 이민규의 "실행이 답이다" 중에서 -

어느 날, 한 사람이 영국의 시인이자 저명한 사상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많이 생각하십시오.” 그는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듯 집으로 돌아와 온종일 움직이지도 않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만 했습니다. 한 달 뒤, 그의 부인이 울상을 지으며 블레이크를 찾아왔습니다. “제 남편이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온 뒤부터 식사도 거르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오로지 명상만 하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제 남편 좀 말려 주세요.” 블레이크가 그 집을 방문해 보니 부인의 말처럼 남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이크를 보고 그는 가까스로 일어나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저는 더는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가 되려면 얼마나 더 생각해야 하나요?” “매일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는 않았군요.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했습니까?” “머리에 더는 담아둘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제가 깜빡 잊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군요. 행동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은 쓰레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 이민규의 "실행이 답이다" 중에서 -

구원의 희망 -희망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4.8.5.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예레30,1-2.12-15.18-22 마태15,1-2.10-14 구원의 희망 -희망 예찬- 희망이, 꿈과 비전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꿈이 없을 때 저절로 속화되고 타락되어 서서히 망가지고 무너지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환멸로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영원해야 합니다. 늘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늘 생생한 희망, 영원한 희망이라야 진짜 희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희망의 사람'입니다. 우 리 정부가 "방한 때 방탄 차량을 써달라." 제안했더니 교황청 고위 성직자는 이렇게 답했다 합니다. "그럼 교황님이 한국에 안 가실걸요."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교황님의 이런 두둑한 뱃장입니다. 두려움이 없으니 방탄 차를 타실 리 만무합니다.   이런 희망이 바로 기쁨이요 행복이요 구원입니다. 마치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는 보물 같은 희망입니다.   이 희망이 있습니까? 하느님이 바로 영원한 희망, 생생한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어 여기 불암산 요셉수도원의 수도승들은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희망을 잃을 때 삶은 거칠어지고 서서히 황폐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5) 제가 좋아하는 시편 구절이자 고백성사 보속의 처방전으로 자주 드리는 구절입니다.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심판이 마지막이 아닌 구원의 희망이 마지막임을 선포합니다. 보십시오.   "네 죄...

나는 행복한가...........(‘좋은 글’ 중에서)

나는 행복한가...........(‘좋은 글’ 중에서)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에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아마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2%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모양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 전 약간의 좋은 것으로 얼른 채워 넣어 다시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 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가 우리 삶에서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감미로운 음악과 하늘과 안개와 별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기도의 힘, 믿음의 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4.8.4. 월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1786-1859)기념일, 예레28,1-17 마태14,22-36 기도의 힘, 믿음의 힘 엊그제 만난 자매와의 면담고백성사 중 언뜻 스치듯 지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평생 고통 중에 살아가는 분입니다. 먼 시골에 내려가 참으로 이런 일, 저런 일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분입니다.   한 번 어려워지면 가난에서 탈출하기가 참 어려운 시스템의 사회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명랑하게 웃었고 여전히 낙천적이었습니다. 믿음의 계급장으로 하면 별 몇 개는 달았어야 할 장군 감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을 대할 때 마다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기도해야 살아남습니다. 기도해야 온갖 세상 유혹에서 빠지지 않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남습니다. 공동전례기도도 중요하지만 개인기도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 1독서 참 예언자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 하난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분명 기도의 차이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라면 거짓 예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대단한 기도의 사람인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하난야에 대한 준열한 경고입니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이런 예레미야의 분별력도 기도의 열매입니다.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이 죽으니 참 비참한 죽음입니다.   기도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으면 누구나의 가능...

행복한 삶 -재미있는 천국-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4.8.3. 연중 제18주일 이사55,1-3 로마8,35.37-39 마태14,13-21 행복한 삶 -재미있는 천국-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우리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소유와 비례하는 행복은 아닐 겁니다. 세계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했다는 우리나라의 행복지수 역시 그리 높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얼마전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재미없는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비유였습니다. 스칸디나반도의 사회보장이 잘 된 나라가 단조로운 일상의 '재미없는 천국'이라면, 고달프기 짝이 없는 삶이지만 역동성이 넘치는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데, 필자는 한 술 더떠 이제 '재미마저 사라진 지옥'이 된 한국이라 했습니다.   과연 '재미있는 천국'의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겠는지요. 가능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통해서입니다.   근원적인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이 행복의 원천임을 증거하는 성서 구절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주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곳 당신뿐이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둔 사람!' 등 끝이 없습니다.   오늘은 '행복한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오늘 2독서 로마서에서 착안했습니다. 행복의 첫 조건입니다.   막연한 주님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말씀을 사랑합니다. 전례를, 미사를, 성무일도를 ...

하느님 중심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4.8.2.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레26,11-16.24 마태14,1-12 하느님 중심의 삶 제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지나면서 깨닫는 바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수도원을 떠나 편히 쉬게 되었다고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아주 짧은 생각입니다.   저에게 안식년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의 하나이자 '수도생활의 연장'이기에 결코 긴장을 끈을 놓지 않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에 대한 여러 호칭이 생각납니다. 수도자, 수행자, 예언자, 구도자, 순례자, 순교자 등 최상의 호칭들입니다. 진정 이 호칭대로 '답게'살 때 하느님의 중심의 삶입니다.   몇가지 깨달음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사람은 떠나도 하느님은 영원히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집'인 교회나 수도원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있어도 형제들은 한결같이 여기서 살아가고 있고, 수도원을 찾았던 형제자매들도 여전히,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을 찾습니다.   아무리 본당 신부가 좋아도 발령을 받아 타 본당으로 떠나면 신자들이 그 신부를 따라 가지 않고 여전히 제 본당에 머무는 것은 바로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믿는 것, 사람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 바로 이게 올바른 신앙행위요 가톨릭 신자들의 자랑입니다. 또 하나 모든 답은 하느님 안에, 미사안에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살다보면 참으로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며 그럴 때 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 안에서 답을,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

성서와 현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4.8.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학자(1696-1787) 기념일, 예레26,1-9 마태13,54-58 성서와 현실 교회 역사에 처음 등장한 프란치스코 이름을 지닌 현 교황입니다. 교황청 인류복음화 성성의 차관인 홍콩 출신의 사비오 혼 대주교와의 인터뷰 기사 한 대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특징은 무엇인가?- "성서를 깊이 묵상하시는 분이다. 그 깊이에서 꺼낸 말씀을 현실에 적응하는 단순명쾌함이 탁월하다. 성서와 현실을 두루 아시는 분이다.“   오늘 강론 주제는 '성서와 현실'입니다. 성서와 현실은 함께 갑니다. '성서 없는 현실은 공허하고, 현실 없는 성서는 맹목이다'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저는 '하늘나라'에 다녀 왔습니다.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인 난지도에 있는 일명, '하늘공원'에서 하늘나라 현실을 체험했습니다. 하늘만 보인다 하여 하늘공원인데 공원대신 나라를 넣어 '하늘나라'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마침 제 운동모자 뒷면에 씌어진 글자가 좋은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Never stop exploring(결코 탐험을 멈추지 마라)“   평생 구도자로, 순례자로 살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머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부터 옴을 깨닫습니다. 하여 체험(體驗), 체득(體得)이란 말도 유래됩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길을 가는 순간, '아, 나는 순례자구나!'하는 깨달음이 왔고, 무거운 배낭을 내려 놓는 순간, '짐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를 확실이 깨달았습니다.   장장 6 시간에 걸쳐 20km여정 중 들린 하늘공원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에겐 하느님만 투명히 현존하는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입니다. 순례여정을 통한 몸의 깨달음이 참으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