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좋은 성서 말씀과 그림들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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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허락이 되서 이 일을 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애착을 가지고 만든 하나하나의 그림과 성서 말씀들이 사람들 마음안에 주님을 찾게하고 믿음의 힘을 얻게하는 도구로 쓰여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절실함, 간절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7.8.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호세8,4-7.11-13 마태9,32-38 절실함, 간절함 어제 읽은 신문기사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느 귀농한 분의 진솔한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귀촌한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텃밭이나 가꾸며 전원생활을 즐기는 귀촌(歸村)은 농사를 업으로 선택한 귀농(歸農)과는 차원이 다르다. 읍내 대형 마트에서 구입해가는 물건도 차이가 있고 싣고 가는 차도 달랐다. 몇 달 전 후배가 찾아와 무겁게 호미질 하던 내게 회사생활이 힘들다며 물었다. "형은 행복하세요. 마을 분들은 잘 해주세요.“ "말해 뭐해. 그 덕에 사는데.“ "내려올 때 뭐가 제일 필요하던대요.“ 이 대목에서 난 좀 뜸을 들였다. 그리곤 무겁게 답했다. "절실함. 그거 없으면 내려올 생각 말아라. 힘들어도 그걸로 버틴다.“ 한 달 뒤 후배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형, 저 이민가려구요.“-(한국일보7.5일 24면). 아, 귀촌 같은 비현실적 액세서리 수도귀족 같은 수도생활도 있겠고, 귀농같이 가난하고 절실한 아주 현실적인 수도생활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사 중 가슴에 와닿은 말은 '절실함' 이었습니다. 이에 하나 덧붙인다면 '간절함'입니다. 비단 귀농 생활뿐 아니라 진지한 삶을 살려는 이는 물론 수도승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절실함이요 간절함입니다. 절실하고 간절해야 삶에 망가지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절실하고 간절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 어른이 없다.‘ 얼마 전 저절로 나온 탄식입니다. 절실하고 간절히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후배들의 귀감이 될 만한 치열한 삶을 사는 어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실함이, 간절함이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한 현역의 전사로 살 수 있습니...

온전한 삶(whole life)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7.7.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세2,16.17ㄷ-18.21-22 마태9,18-26 온전한 삶(whole life) 결핍된 인간 존재입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만족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채우고 채워도 부족할 뿐입니다.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을 통해, 또 타고난 부족함이나 병고를 통해 결핍된 인간 존재임을 절절히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나 한 회당장의 딸의 죽음이 그대로 결핍된 인간에 대한 결정적 표지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made you whole again).” 당신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에 대해 구원을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마치 미사에 참석해 믿음으로 당신 성체를 모심으로 구원 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 같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바 영어를 직역했을 때의 '너의 믿음이 너를 다시 온전하게 하였다'입니다. 또 영어주석 마지막 부분도 은혜로웠습니다.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온전케 해주시도록 예수님께 기도하자. 거룩함이 온전함이고, 온전함이 거룩함이다 (Let us today pray for Jesus to heal us and make us whole, the wholeness that is holiness, the holiness that is wholeness)." 구원은 바로 온전해짐을 뜻합니다. 결핍됨이 없는 충만한, 둥근 상태를 뜻합니다. 누구나가 희구하는 바가 온전한 삶입니다. 우리를 둥근 삶, 둥근 마음으로 온전하게 해주실 분은 주님뿐이 없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온전함이나 거룩함이 영어 발음도 '호울리...

주님과 함께 하는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7.6. 연중 제14주일 즈카9,9-10 로마8,9.11-13 마태11,25-30 주님과 함께 하는 삶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 뒤에는 늘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이 어김없이 뒤따릅니다. 며칠 전의 깨달음도 새롭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앞에서 수도자답게 살면 바로 거기가 수도원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고 성인이 있어 성지이듯, 수도원 있어 수도자가 아니라 수도자가 있는 바로 거기가 수도원입니다. 오늘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내적공간을 마련하십시오.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 영적과제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넉넉하고 큰 내적공간입니다. 삶은 공간입니다. 공간은 생명입니다. 공간은 자유입니다. 싸움의 궁극 원인도 결국은 공간 확보에 있습니다.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이 구체적 사랑 실천입니다. 여기 왜관수도원에 머물며 우선적 깨달음이 '참 넉넉하고 커서 좋다.'는 것입니다. 방도 정원도 넓고 크니 마음도 넉넉하고 커지는 느낌입니다. 이런 외적공간이 상징하는바 내적공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마련되고 확장되는 내적공간입니다. 수도원 안뜰의 넉넉한 푸른잔디의 봉쇄지역이 상징하는바 역시 우리 내적공간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계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 역시 우리 마음의 내적공간을 상징합니다. 이런 내적공간을 지닌 이들이 진정 영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천사가 가르쳐 준 "행복한 방법"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녀는 어렵게 가시 덤불을 제치고 들어가 거미줄에 걸려 있는 나비를 구해 주었습니다. 나비는 춤을 추듯 훨훨 날아갔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돌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사는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천사는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소곤거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늘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녀는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도록 언제, 어디서나 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녀를 사람들은 모두들 부러운 눈빛으로 우러러 보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예쁜 소녀가 호호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곱게 늙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할머니가 죽기 전에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그 비밀 중의 큰 비밀, 그 비결이 무엇인지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임종을 눈앞에 둔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모두들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적이 있지, 그 대가로 천사는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 내가 나비 천사를 구해주었더니 천사가 내개 다가와 향기로운 입을 내 귀에 대고는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구해주어서 고마워요,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사시면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평생 행복하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더니, 정말 평생 너무나 행복했던 거야, 사실은 천사가 내 소원을 무조건 들어 준 것은 아니 것이야. 누구든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한 줄 알고, 매사에 감...

나를 따라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7.4.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아모8,4-6.9-12 마태9,9-13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새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임을 깨닫습니다. 주님만이 바로 우리 삶의 방향입니다. 주님 방향을 잃어 혼란이요 복잡한 삶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방황은 끝나고 안정과 평화, 순수와 진실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9,9). 주님의 연민 가득한 눈길이요 눈빛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는 바로 자기 안에 갇힌 외롭게 소외된 이들을 상징합니다. 방향을 잃은, 그러나 내면은 끊임없이 주님을 찾았던 마태오요, 이런 내면의 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의 눈길임이 분명합니다. 즉시 주님은 마태오를 부르셨고, 지체없이 일어나 그분을 따라나선 마태오입니다. 비로소 자기로 부터의 탈출이요 새로운 출발입니다. 바로 이게 회개입니다. 주님은 고립단절 소외되어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어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합류시키시니 바로 이게 구원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철부지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잘 들여다보면 병자 아닌 사람 없고 죄인 아닌 사람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건강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라 병자이기에, 우리가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

좋은 글 - 07/2014 - part 1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칼리 피오리나). 우리 삶에 만일 겨울이 없다면, 봄은 그다지 즐겁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때때로 역경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성공은 그리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앤 브래드스트리트). 모든 일에 실패했을 때, 조심스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을 때, 당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승리이다(키에르케고르). 사람은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비로소 다이아몬드와 인간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마리 에브너 에쉰바흐).

소통(疏通)의 사회 -공정을 물처럼, 정의를 강물처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2014.7.2.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아모5,14-15,21-24 마태8,28-34   소통(疏通)의 사회 -공정을 물처럼, 정의를 강물처럼-   오늘 복음을 읽던 중 '마귀들린 사람 둘'이란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마귀들린 사람들은 바로 불통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요근래의 화두는 단연 '소통'으로 불통의 시대임을 반영합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바, 소통의 어려움입니다. 불통으로 인해 야기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오늘 날 양상은 다르지만 불통의, 마귀들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어디서 문제가 터질지 전전긍긍의 현실입니다.   세월호나 지오피 참극에 관여된 이들, 어떤 면에서 마귀들인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영육으로, 위로 아래로, 좌우사방으로 소통해야 건강한 사회요 사람들입니다.   불통의 마귀들린 시대에 소통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아모스 예언자와 예수님은 과연 소통의 대가들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위로 하느님과의 소통은 이웃과의 소통으로 직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제물도 거들떠 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바로 이게 예언자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과의 축제를 즐기기 전, 아름답고 거룩한 전례에 앞서, 선을 찾고 사랑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며 우선 이웃과의 소통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리라. 그래야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

삶의 중심(center)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4.7.1.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아모3,1-8;4,11-12 마태8,23-27   삶의 중심(center) 삶의 중심을 잡으라 정주(定住:stability)의 수행이요, 향심기도(centerlng prayer)의 수행입니다. 삶의 중심에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참 평화와 안정입니다.   중심은 영혼입니다. 중심 없는 이는 영혼도 없습니다. 중심이, 영혼이 없어 삶이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중심이, 영혼이 확실할 때 안정과 평화에 충만한 삶입니다. 삶은 단순해지고 걱정도 줄어듭니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중심의 방향만 제대로 되어있으면 속도는 문제가 아닙니다. 방향 없는 질주의 과속 시대가 문제입니다.   "다 쓰고 갑니다.“ 한 비야 자매가 미리 정해 두었다(천양희;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112쪽)는 참 기막힌 묘비명입니다. 확고한 삶의 중심을 살고 있기에 이런 신앙고백입니다. 자매의 아름다운 삶의 비밀이 환히 들어납니다. 어제 지인과의 문답 중 새삼 깨달은 진리입니다. "베론 성지 근처에는 볼 것도 많습니다. 하루 묵으면 볼 수 있을 텐데요.“ 고마운 뜻은 알겠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베론과 주변의 성지만 보고 당일 오겠습니다. 주변의 관광은 그만 두겠습니다.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에버랜드의 교육효과입니다. 젊은 수도형제들과 한 번 소풍 같던 에버랜드였는데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화려하고, 볼 것도, 놀 것도, 사람들도, 많은 에버랜드인데 참 공허했습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에버랜드였습니다.   꼭 대찰(大刹) 없는 명산처럼, 고승(高僧) 없는 절처럼, 향기(香氣) 없는 꽃처럼, ...

성덕(聖德)의 잣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4.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아모2,6-10.13-16 마태8,18-22   성덕(聖德)의 잣대 남산을 오르다보면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을 그리는 높이 솟은 추모비가 있고 선생의 '임'이란 시 한편이 담벽에 조각되어 있습니다. "임이여 어디 갔노, 어디메로 갔단 말고 풀나무 봄이 되면, 해마다 푸르건만 어찌하다 우리의 임은 돌아올 줄 모르나 임이여, 못 살겠소. 임 그리워 못 살겠소. 임 떠난 그날부터 겪는 이 설음이라. 임이여, 어서 오소서, 기다리다 애타오. 봄맞이 반긴 뜻은 임 올가 함이러니 오지 않고 봄이 그만 저물어서 꽃지고 나비 날아가니, 더욱 설어 하노라. 강물이 아름아름, 끝간 데를 모르겠고, 버들가지 출렁출렁, 물속까지 드리웠다. 이내 한 길고 또 길어 그칠 줄이 없어라. -1945년 함흥 옥중에서 조국 광복을 기다리며 외솔 읊음-“ 구구절절 나라 사랑이, 조국 광복을 그리는 사랑이 배어있는 시입니다. 하여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애국지사 최현배 선생이었습니다.   순국(殉國), 순교(殉敎), 순직(殉職) 등 대상은 다르지만 극진한 사랑과 충실성의 표현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임'은 한용운 시인의 '임'과 똑같이 잃어버린 '나라'였음이 분명합니다. 선생에게 임이신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그대로 우리의 임이신 하느님 사랑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게 합니다.   과연 임이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지요. 모든 성소와 성덕의 잣대는, 수행과 순교의 원동력은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따르겠다는 율법학자와 제자에 대한 주님의 시험이 참 엄중합니다. 그대로 주님 사랑에 대한 시험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