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3의 게시물 표시

♥자비에 대하여/안젤름 그륀 신부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도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부인한다면, 그를 질책하지 마시오. 그의 용기를 꺾는 일이기 때문이오. 오히려 그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용기를 잃지 마시오, 형제여!’ 그러나 그대는 그의 영혼이 회개하도록 일깨운 것이라오.”  (금언집597) 진실을 시인하라고 남을 닦달하는 대신에, 그를 위로하고 그를 다시 올바로 서게 한다. 진실되이 꾸짖고 나무람으로써 다른 이를 제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하면 그는 슬프게 떠나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포기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거리낌 없이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가는 것이고, 우리자신이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께 조건 없이 사랑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삶의 불쾌한 부분들과 대면할 용기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감동을 받아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불안과 신뢰/안젤름 그륀 신부

    불안과 신뢰, 무엇이 더 현실적일까? 우리는 불안과 믿음을 모두 안고 산다. 불안만 있는 사람이나 믿음만 있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불안에 집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불안하기 때문에  실재 위험을 깨닫고 우리를 지킬 힘을 얻으며, 우리의 한계를 받아 들이게 된다. 우리는 심신의 불안을 느끼면서 세상의 부정적인 흐름에 맞서고 선을 위해서 싸울 힘을 얻는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투쟁하면서 불안에만 이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함은 끝내 악함보다 강하다고 믿어야 한다. 신뢰는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신뢰와 확신이 굳어지도록 노력할 수 있다. 만약 인생의 경험에서 얻은 신뢰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그 부족을 채우거나, 없애고, 강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순수한 마음 - 2013.8.24 토요일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8.24 토요일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 묵21,9ㄴ-14 요한1,45-51     순수한 마음     순수한 마음 자체가 보물이요 축복입니다. 수도생활의 궁극목표도 ‘순수한 마음’에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 아침성무일도 시 마음에 와 닿은 시편입니다. ‘마음 순수한 이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기쁨이 솟나이다.’로 바꿔 말해도 무방합니다. 마음 순수한 때 진정 참 사람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 순수할 때 마음의 눈이 열려 하느님을 봅니다.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자비요 지혜요 겸손입니다. 오늘은 순수한 마음에 대해 네 측면에 걸친 묵상입니다.   첫째, 하느님 향해 항구히 노력하는 삶일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며칠 전 읽은 미국에 있는 사막 수도원의 아빠스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 성인과 신비가가 되길 원했다. 이제 나는 항구하고 언제나 그분 사랑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어느 것이, 어느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도 없다. 다만 끝까지 항구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항구히 노력할 때 순수한 마음의 은총이요 순수한 마음일 때 항구할 수 있는 힘도 나옵니다.   둘째, 주님은 먼저 나를 아시고, 주님과 만남으로 나를 발견할 때 주님도 발견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내 마음 순수하다면 하나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께 오시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첫 눈에 나타나엘의 순수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자신을 발견한 나타나엘은 눈이 열려 ...

♥자유란 무엇일까/안젤름 그륀 신부

자유란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고 삶이나 죽음을 스스로 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그 자유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어떻게 살지 결정할 자유가 있다. 그날에 만족할지, 아니면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불평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절대적 자유는 없지만 상대적 자유는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상대적 자유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결정을 내리던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는 질병이나 나이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는 있다. 궁극적 자유란 우리의 운명을 마음으로 긍정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생을 이야기 하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죽음 뒤에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안젤름 그륀 신부

우리는 지금 모습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죽고 우리의 죽은 육체는 썩는다. 사람은 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하느님과 우주와 하나가 된다고 믿는다. 교회는 우리가 영과 육으로 부활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육체는 정신의 기억을 저장하는 곳이다. 우리는 육체로 모든 중요한 경험을 한다. 기쁨과 사랑, 아픔을 몸으로 직접 체험한다. 결국 우리가 영과 육으로  하느님에게 이른다는 말은 우리의 본질이 하느님 안에서 구원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뒤에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한다. 나치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사형집행인에 의해 그들의 생명을 빼앗길 수는 있어도, 사랑만은 빼앗길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 뒤에도 우리의 인격적 존재가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격적 존재와 자아를 혼동하면 안 된다. 자아는 죽음으로 깨어진다. 죽음 뒤에 남는 것은 우리의 참 본성과 깊은 본질, 우리의 자기(selbst)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 론에서 죽음 뒤의 삶을 다음과 같이 과감히 표현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쉬면서 보고, 보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찬양할 것이다. 이것이 끝없는 끝의 본질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 더 마땅한 끝이 있을까?”   (인생을 이야기 하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하느님 안에 정주(定住)의 삶 - 2013,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8,26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1테살1,1-5.8ㄴ-10 마태23,13-22 하느님 안에 정주(定住)의 삶 -믿음, 희망, 사랑- 오늘은 ‘하느님 안에 정주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사람으로 살기보다 더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환경 따라 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변절, 변신, 변심으로 사람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요.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는지요. 오 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독서의 테살로니카 교회 사람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자들아!’   예수님의 깊은 슬픔이 담긴 분노의 대상이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은 별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정주하지 않을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하느님 안에 정주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한 결 같이 진실하고 성실한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릴 때 나를 잃어버려 무지와 허영, 교만의 위선적 삶이 뒤따릅니다. 이건 학식이나 이성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썼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시의 첫 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25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이렇게 하느님 안에 정주하여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아갈 때 변질,...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행동은/안젤름 그륀 신부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자살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자신의 상황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하지만 자살해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한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삶과 죽음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시다. 둘째, 자살은 자기애를 위배한다. 셋째,  자살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면 안 된다. 우리는 늙고 병든 사람이 먹기를 거부할 때 그에게 인위적으로 먹일 필요가 없다. 영혼이 죽음을 예감할 때 천천히 죽고 싶은 욕망은 그가 가진 권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생명을 능동적으로 중단할 권한이 없다. 그것은 성공적인 죽음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능동적인 안락사나 자살 조력에 대한 논의에서 자유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충실할 때 자유롭다. 하지만 내적 사명을 거스르는 일을 선택할 때는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자살이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느님에게  판단을 맡긴다. (인생을 이야기 하다) - 안젤름 그륀 신부지음-

감사라는 말의 위력

감사라는 말의 위력  말이 입안에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지배하지만 말이 밖으로 나오면 말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꿰는 하나의 틀이 됩니다.   즐겁고 행복한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자주  접함으로써 부정적인 상황과 자신을 멀찌감치  떨어뜨려야 합니다.   행복한 단어를 마음과 입에 꿰는 순간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 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 해야 합니다.   행복을 주는 단어를 입에서 내뱉는 순간 내 얼굴도 함께 웃게 됩니다. 행복한 단어가 바로 웃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말 자체만으로도 큰 위력을 가지며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는 역활을 합니다.   감사는 마음 웃기의 시작이며 감사가 있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웃음은 없습니다.   웃기 전에 의식적으로 감사의 말을 되풀이  해보면 웃기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감사' 라는 말을 하면 실제로 얼굴은  가볍게...

진실한 삶 - 2013.8.27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8.27 화요일 성녀 모니카(332-387) 기념일 1테살2,1-8 마태23,23-26 진실한 삶 오늘은 ‘진실한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 진실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진실 자체가 위로와 힘이요 감동이자 치유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외모가 빼어난 사람보다 마음을 끄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하여 ‘참 진(眞)’만 들어가는 말만 들어도 반갑습니다. 진실(眞實), 진리(眞理), 진정(眞情), 진심(眞心), 진인(眞人), 진국(眞-) 등 무수합니다. 진선미(眞善美)라는 말에서 진(眞)이 앞자리에 있는 것도 모든 사물의 바탕은 진(眞)이 근본임을 깨닫게 합니다.   진실한 사람을 찾는 다음 시편의 절규는 그대로 오늘에도 해당됩니다. ‘경건한 자 끊어져 없사오나, 주여 구하여 주소서. 아담의 후예 중에 진실한 사람이 없나이다. 저마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간사한 입 두 마음으로 말하나이다.’(시편12,1-2). 예나 이제나 부정적 인간 현실은 그대로 같습니다. 진실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안과 밖이 같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아침 미사대장에 싸인 하던 동료 수도사제의 글씨에 눈이 멎었습니다. ‘이사악(離邪惡)’, 구약의 이사악 이름입니다. ‘사악에서 분리됨’을 뜻하는 한자 풀이가 볼 때 마다 신선합니다. 바로 진실한 삶, 순수한 삶에 대한 원의가 그대로 드러나는 수도형제의 ‘이사악(離邪惡)’ 수도명입니다. 오늘 1독서의 바오로 일행과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탄의 대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전자가 진실한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표리부동의 위선적 사람들입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진실한 삶이 될 수 있겠는지요? 첫째,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말 그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하느님 중심의 삶입...

하느님 중심의 삶 - 2013.8.28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8.28 수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일 1테살2,9-13 마태23,27-32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는 성녀 모니카의 축일에 이어 오늘은 그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입니다. 모자가 성인입니다.   아침성무일도를 보던 중 즈가르야 노래 후렴과 성모의 노래 후렴이 깊고 아름다워 나눕니다. ‘주여,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하셨나이다. 당신 안에 쉬게 될 때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온치 못하리이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게 하셨나이다.’ 모두 성인의 불후의 명저 고백록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우리 수도승들처럼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사셨던 성인이심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저절로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며칠 전 어느 수도형제 모친의 장례미사에 참석했다가 제의 방에 놓여 있던 영어로 쓰여 진 글귀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사제여, 오늘이 처음미사이자 마지막 미사처럼, 유일한 하나의 미사처럼 봉헌하라.’ (성 프란치스코). 어제 읽었던 어느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오늘 너는 태어났고, 오늘 너는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다. 내일은 떠나는 나그네처럼 매일을 그렇게 살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환상이 걷힌 삶의 기본에 충실한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역시 1독서의 바오로 일행과 율법학자들 및 바리사이들의 생활자세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오로 일행은 분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