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3의 게시물 표시

기도가 답이다 - 삶, 말씀, 기도- 2013.7.26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7.26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탈출20,1-17 마태13,18-23       기도가 답이다   -삶, 말씀, 기도-     아침 미사 후 수도원 정문에 가던 중 아주 믿음이 좋은 자매와의 덕담이 생각납니다. 수도원 초창기부터 무려 25년 동안 알고 지낸 ‘믿음의 자매’입니다.   “자매님은 군대로 말하면 별을 단 장군입니다. 그동안 산전수전 다 믿음으로 승리했으니 말입니다.”   보이지 않아 그렇지 볼 수 있다면 아마 별 몇 개는 달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달아주신 믿음의 별, 계급장입니다. 격려성 덕담에 너무 기뻐하는 자매님의 꽃 같은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문득 떠오른 주제는 ‘기도는 답이다’였습니다.   ‘하느님의 답이다’, ‘사랑이 답이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해야 살고, 기도해서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질서도 분명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절차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질서도 실종입니다. 도대체 기도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여 우리 분도수도회의 모토도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얼마 전 읽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하느님 찾기를 포기한 채 더 이상 기도하기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하느님을 공격하는 어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비탄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그대/다시는 기도하지 않고/다시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궁극의 지혜, 궁극의 선, 궁극의 힘 앞에 머물기를 허...

진정한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안젤름 그륀 신부

진정한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 인생을 이야기 하다 )   성공이란 내가 정한 목표에 도달함을 의미할 수 있고, 내가 외부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사람을 두고서 성공했다고 말한다. 경제적 성공이란, 기업이 좋은 결과를 얻어서 높은 수익을 올리거나,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임금협상에서 더 높은 연봉을 얻어 내는 것이다. 진정한 성공기준은 무엇일까? 첫째, 오래 지속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공은 적당해야 한다. 자신의 한도를 넘는 사람은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오래 지속하는 성공에는 건강한 기반이 필요하다. 둘째, 남을 희생하지 않고서 거두는 것이 성공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서 얻는 성공은 금방 탄로가 난다. 진정한 성공은 능력의 결과이다. 결코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데 근거하지 않는다. 셋째, 성공에는 항상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팔려는 물건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경제적 성공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노하우를 갖고 있고, 사람들을 잘 이끄는 리더십이 강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실할 때만 성공을 오래 지속할 수가 있다. 당장의 성공을 위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은 오래 성공하지 못한다. 회사를 경영할 때는 기업과 고객이 모두 승리감을 느끼도록 운영하고 관리해야 한다. 자신이 조성한 적대 분위기는 다시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직원들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회사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자신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회사는 무력해 지고 가치를 잃어버린다. 이는 직원들의 공동생활 뿐 아니라 재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회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 우리에게는 선함과 진실을 위해서 오래 노력하는 사람이...

만남

깊게 뿌리내리는 만남이든지, 가볍게 스쳐 지나는 만남이든지, 모든 만남은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며 인생의 사계절을 가르쳐 주는 지혜서다(이해인).

행복의 얼굴

행복의 얼굴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마음의 문 활짝 열면  행복은 천 개의 얼굴로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어디에 숨어 있다 고운 날개 달고 살짝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행복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 이해인 수녀 글 중에서 -

인간은 왜 인생의 의미를 물을까/안젤름 그륀 신부

인간은 왜 인생의 의미를 물을까? ( 인생을 이야기 하다 )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랑클은, “인간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하듯이, 삶의 의미도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존재라고 했다.” 그는 많은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 병에 걸린다고 주장 했다. 프랭클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 경험 가치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는 순간, 그 의미를 묻지 않는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둘째, 창조 가치이다. 우리는 무엇을 처음 만들고 성공할 때도 삶의 의미를 느낀다. 셋째, 관점 가치이다. 우리는 몸이 아프거나 부당하고 힘든 일을 겪을 때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병들고 구속받는 상황과 운명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즉, 우리의 정신이 해야 할 일은 질병과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내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그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할까?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의미는 우선 하느님이 예정한 유일의 삶을 사는데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행함에서도 다음과 같은 의미를 발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매일 아침 일어나고 일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힘을 쓰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피하면 안 될 문제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노력하는가?” 이 문제를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고 충만하게 된다. 프랑클은 삶의 의미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는 오히려 인간이 자기 삶에 부여하는 의미에 달려있다. 특히 인생의 힘든 고비에 처할 때 그렇다. 이 순간에 의미를 인식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정신은 이때도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이 의미는 임의로 결정할 수...

기도와 헌신의 정신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교회 수도 생활 전통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각기 활동 수도생활과 관상 수도생활의 모범입니다. 둘 다 주님을 사랑하였지만 마르타는 주님을 위한 일로, 마리아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묾으로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을 얼핏 보면 주님께서 마리아만 두둔하시는 듯합니다. 주님을 위해 마르타가 더 많이 수고하고, 마리아는 얌체처럼 그리고 편안히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라고 하시며 마리아가 그걸 택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마치 마르타의 역할은 필요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마르타의 역할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일에 더 신경과 정신을 쓰지 말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수도생활 안에서는 끊임없이 기도를 강조하며 일중독(workaholic)을 경계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빠지고 일에 정신이 빠지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반대의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을 빙자한 현실도피와 게으름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첫째로 주님을 빙자한 현실도피를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현실도피란 사람과 일 모두를 피하여 주님께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과 일이 바로 하느님께서 내게 맡긴 것인데 꼴 보기 싫어서 그 사람을 피하는 것이고, 하기 싫어서 그 일을 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맡긴 사람과 일은 피하면서 하느님께로 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실을 도피하여 수도원, 특히 관상 수도원에 들어가고,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노상 성당에 가서 기도...

좋은 생각만 하고 살자/안젤름 그륀 신부

좋은 생각만 하고 살자 ( 사막을 통한 생명의 길 ) “그대 마음의 파수꾼이 되어 묻지 않고는 그 어떤 생각도 들여보내지 마시오. 생각 하나 하나에 이렇게 물으시오. ‘너는 우리 생각중의 하나냐, 아니면 원수가 보낸 생각이냐?’ 만일 원수로부터 온 것이라면 분노를 통해 그대를 혼란케 하거나 욕망을 통해 그대를 흥분시킬 것이오.”(편지11) 에바그리우스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생각들만 들어오게 하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생각들을 검토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으며, 내적 혼란과 느낌의 혼돈만을 겪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오직 평화로 채워줄 생각들만 들여보내는 믿을 만한 문지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 속 방안에서, 우리 안에 숨어 계시면서 비밀스럽고, 억눌리고, 무의식적인 것들을 밝혀주시고 비춰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자유의 여정(旅程) 자유 예찬- 2013.7.19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7.19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탈출11,10-12,14 마태12,1-8 . 자유의 여정(旅程) -자유 예찬- . 오늘 말씀 묵상 중 퍼뜩 떠오른 말마디는 ‘자유’였습니다. 자유를 찾는 사람입니다. 자유로워 행복입니다. 자유로워 인격입니다. 자유로워 사람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중 마음에 와 닿은 시편 한 구절입니다.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시편100,1). 하느님께 나아갈 때 참 자유입니다. 매일의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가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은 자유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자유를, 사랑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할 분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운 삶입니까? 온통 우리를 노예화 하는 ‘사탄의 시스템’ 같은 신자본주의 세상입니다. 깨어 살지 않으면 자유롭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느 작가의 칼럼기사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불안한 일자리와 불 꺼진 집 사이에서 1인 가구는 외롭다. 고용 없는 성장, 승자독식사회에서 1인 가구는 쓸쓸하다. 외롭고 쓸쓸하되 ‘높지’는 못한 젊은이들의 일과 숙소 사이에 커피숍이 있다.- 외롭고 쓸쓸한 게, 어렵고 힘든 게 인생입니다. 요즘은 더욱 실감나게 와 닿는 현실입니다. 하여 ‘높은’ 초월적 거점이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믿어 높은 초월적 거점을 확보할 때 외롭고 쓸쓸한 중에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초월적 거점을 확보해 주는 구체적 수단이 바로...

승리의 행진(行進) - 2013.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7.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탈출12,37-42 마태12,14-21 승리의 행진(行進) 오늘 1독서의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하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흡사 승리한 군대의 행진 같습니다. ‘행진’, ‘주님의 모든 부대’ 등 어휘도 군대의 용어입니다. 화답송 시편의 찬미가는 행진 시 군가 같습니다. 순례 여정 중 찬미가를 힘차게 부르며 걷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역동적인 장면이겠는지요. 오늘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의 행진은 그대로 순례여정 중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우리 분도수도형제들이 저녁기도에 앞서 스타시오 한 후 행렬을 지어 성당으로 입당할 때 승리의 행진 모습 또한 하느님을 향한 순례여정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주일 미사 때 마다 줄을 지어 수도원 정문을 통과하여 들어오는 신자들의 모습 역시 승리의 행진을 연상케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다음 대목에서 깨닫는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삼십 년이다. 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에서 나왔다.’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때와 하느님의 때는 다릅니다. 하느님은 430년 기다린 후 때가 됐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의 위업을 감행하십니다. 하느님의 때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승리의 행진 중인 이스라엘 백성의 총사령관은 주님의 종 모세지만 실제 승리로 이끈 분은 하느님이심을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우리가 새워야 할 그날 밤은 바로 주님 부활에 앞선 부활 성야의 성토요일 ...

환대(歡待) 영성 예찬` - 2013.7.21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7.21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창세18,1-10ㄴ 콜로1,24-28 루카10,38-42 환대(歡待) 영성 예찬` 오늘은 ‘환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환대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말뜻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기쁘게 맞아 정성껏 대접함’이라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환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13년 전에 써놨던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란 글을 나눕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찌푸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환대 받은 감미로운 체험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 역시 아주 오래 전 분도수도자 모임에 참석했을 때 배정 받은 방에 안내되어 들어서는 순간 온 몸으로 환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갈하게 정리된 참 넓은 공간의 맑고 환한 방이었습니다. 흡사 제가 왕자라도 된 듯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환대 체험은 그대로 구원체험이요 자존감을 드높입니다. 반면 우리를 위축시키고 자존감을 약화시키는 냉대(冷待)의 상처 체험 역시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환대의 사람인지, 또 내가 살고 있는 집은 환대의 집인지 성찰케 합니다. 오늘은 환대의 세 측면을 나눕니다. 첫째,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환대의 사랑입니다. 가슴 활짝 열고 차별 없이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성경도 온통 우리를 환대하시는 하...

참 다행이다(‘좋은생각’ 중에서)

참 다행이다(‘좋은생각’ 중에서) 영국 심리학자 브레이저 박사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주 하는 것을 알아냈다. “나한테 딱 1억 원만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이도 남들처럼 공부를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잘사는 사람과 결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미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주로 ‘내가 ~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정형 질문에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혔다. 브레이저 박사는 그들에게 ‘나는 ~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는 문장을 매일 네 개씩 만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부러운 이들을 떠올리며 불평하던 때와 달리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문장을 완성했다. “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 다행이야.” “난 오늘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이 있어 다행이야.” “난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다행이야.” 브레이저 박사는 이 훈련을 한 지 6개월 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합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환한 얼굴로 고래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참 다행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여러분 역시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행복한지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안젤름 그륀 신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인생을 이야기 하다 ) 그리스 사람 루까는 예수님이 가르친 원수를 사랑함이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축복이란 다른 사람의 선함을 생각하고 그것을 입으로 말하며, 그에게 좋은 일이 생기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그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안에 숨어 있는 선함을 발견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관계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는 축복하면서 내 안의 선함이 강해짐을 느낀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기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미친다. 성 베네딕토는 형제를 사랑하고 잘못을 미워하라고 권고한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을 구체화한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사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테러리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안전을 꾀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있지만, 테러리즘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원수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나의 행복을 어떻게 찾을까/안젤름 그륀 신부

나의 행복을 어떻게 찾을까? ( 인생을 이야기 하다 )    행복은 충만한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행복을 만든다는 것은 우선 의식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살고, 내면의 힘을 쏟아서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  위대한 사람,  똑똑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되려는  환상을 깨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자신을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이기를 원하고,  나를 좋아하고,  내 삶에 만족한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지 않는다. 나는 나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서 나이기를 원한다.”   행복의 길은 언제나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끝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도 포함된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감사히 받아들인다면, 행복은 우리가 찾지 않아도 우리를 찾아 올 것이다.   감사하면서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찾아온 행복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행복을 누리며 만족할 수 있다. -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