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1의 게시물 표시

내 인생의 사막

내 인생의 사막 내가 사하라 사막에 있다면, 거기서 완전히 고립되어있다면 나는 사하라 사막 그 자체이다. 나의 일부가 그 전부이고, 그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생명이 전무한 사막처럼 이 세상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나와 말을 나눌 사람이 없는 날은 나는 사하라 사막보다 더한 고독에 빠져있는 고립의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그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를 놓지 않고 당기는 뭔가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가에 눌린 것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그 상황을 아무리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준다 한들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 내가 보는 세계는 만인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나만의 영역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상대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한들, 그렇게 고독에 빠진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설령 옳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그를 위해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거려 수긍해 줄 때 나는 그를 위해 대단한 봉사를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하라 같은 절대 고독의 상황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어려운 상황에서 인간은 자기만의 신앙을 찾는다. 기근으로 쓰러질 지경에 놓인 사람에게는 한 조각의 빵이, 목이 마라 죽어가는 사람에겐 시원한 물 한 방울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중인 사람에게는 위에서 내려주는 밧줄 하나가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달콤한 다른 말이나 조건도 의미가 없다. 그 충분조건을 제공할 때 그는 나의 사람으로 다가와 내 말을 들어주며, 나의 친구가 되거나 동지가 된다. 최복현 칼럼 -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마음을 위한 기도 - 이 해인

늘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실함, 어떤 모양으로든지 관계를 맺는 이들에게는 변덕스럽지 않은 진실함을 지니고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힘겨운 시련이 닥치더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견디어내는 참을성으로 한 번 밖에 없는 삶의 길을 끝까지 충실히 걷게 해 주십시오. 숲속의 호수처럼 고요한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게 바삐 돌아가는 숨찬 나날들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마음의 고요를 키우고 싶습니다. 바쁜 것을 핑계로 자주 들여다보지 못해 왠지 낯설고 서먹해진 제 자신과도 화해할수 있는 고요함, 밖으로 흩어진 마음을 안으로 모아들이는 맑고 깊은 고요함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고요한 기다림 속에 익어가는 고요한 예술로서의 삶을 기대해 봅니다. 마음이 소란하고 산만해질 때마다 시성 타고르가 그리 한것 처럼 저도‘내 마음이여,조용히, 내 마음이여,조용히’하고 기도처럼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늘을 담은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지나친 편견과 선입견으로남을 가차없이 속단하기 보다는 폭넓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지니고 싶습니다. 내 가족, 내 지역, 내 종교만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마음을 넓히는 시원함으로 나라를, 겨레를, 세계를 좀 더 넓게 바라보고 좀 더 넓게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밤새 내린 첫눈처럼 순결한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악과 타협하지 않고 거짓과 위선을 배격하는 정직한 마음, 탐욕에 눈이 멀어 함부로 헛된 맹세를 하지 않으며, 작은 약속도 소홀히 하지 않는 진지함을 지니고 싶습니다. 감각적인 쾌락에 영혼을 팔지 않으며, 자유와 방종을 혼돈하지 않는 지혜로움, 어린이 같은 천진함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용기를 지니게 해주십시오. 사랑의 심지를 깊이 묻어둔 등불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8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토빗2,9-14 마르1,13-17 "하느님 중심의 삶" 대부분의 불행은 무지의 어둠에서 기인합니다. 무지로 인한 오해, 착각, 환상입니다. 깨달음의 지혜, 분별의 지혜로 밝아질 때 무지로 인해 파생됐던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이 아니라 해소됩니다. 분별의 지혜는 분별의 눈, 깨달음의 지혜는 깨달음의 눈입니다. ‘깨달을 각(覺)’자 안에 ‘볼 견(見)자’ 눈이 들어있음이 의미심장합니다. 지혜와 눈은 직결됨을 봅니다. 제대로 보지 못해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제대로 보는, 넓고 깊은 시야와 안목을 지닌 이가 진정 현자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질 때 보는 눈도 더욱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하느님의 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눈멀어 가면서 하느님의 눈을 잃어감으로 파생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문제들입니다. 하여 교육의 궁극 목적도 이런 ‘볼 눈’을 갖게 해주는 것, 즉 하느님의 눈을 지니게 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눈 없는 지식 축적의 교육이 아니라 눈 밝게 해주는 하느님 중심의 지혜 공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지혜가 참 놀랍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선사되는 이런 천상적 지혜요, 하여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진지한 물음 같지만 양자택일을 요하는, 이래저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세금을 바치라하면 민족반역자요 세금을 바치지 말라하면 국사범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야는 아주 좁습니다. 하느님의 눈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를 예리하게 간파하신 주님의 역습입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 한 닢을 들이대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물으신 뒤 ‘황제의 것입니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일언지하에 답을 주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30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신명4,1.5-9 마태5,17-19 "사랑은 율법의 완성" 제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평생학인(平生學人)입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을 배워야 하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이라는 말입니다. 어제 켈트 성인 전을 읽다가 오늘 복음과 관련되어 아이단 성인에 대한 다음 묘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이단은 모범으로 가르쳤다(Aidan taught by Example)” 강조하기 위한 까닭인지 ‘모범(Example)’의 영어 첫 자가 대문자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배운다 합니다. 삶의 모범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배움 중에 있는 학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는 이런 모범으로 가르치는 삶의 스승입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다음 대목도 생각납니다. “그분은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를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로 저술하셨다. … 실상 성인께서는 당신이 사신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성인은 친히 사신 체험을 기초로 하여 규칙서를 저술하셨고 사신 것만을 가르치셨습니다. 규칙에도 이런 성인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아빠스는 모든 좋은 것과 거룩한 것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다. 또 자기가 제자들에게 부당하다고 가르친바는 무엇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 가르칠 것이다.” 아빠스는 수도승들을 행동으로 가르치는 삶의 스승으로, 또 ‘살아있는 복음서’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20세기 성녀로 일컫는 ‘도로시 데이’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선전 선동에 참여하는 데 있지 않고, 심지어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살아있는 신비’가 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이 실존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삶이 의미를 갖지 못하리라는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사랑의 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2011.4.1 사순 제3주간 금요일 호세14,2-10 마르12,28ㄱㄷ-34 "사랑의 샘" 서울 역 창문에 있던 ‘시’란 시가 생각납니다. “한 장 낙엽 달빛 잉크로 쓴 일 곱자의 시 사람을 사랑하라.” (황 금찬). 오늘 강론 주제는 사랑입니다. 저에겐 세분의 형님이 있습니다. 모두 제가 수도원에 들어온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름도 순서에 따라 첫째는 ‘일철(요셉)’이고 둘째는 ‘이철(베네딕도)’이고 셋째는 ‘삼철(세례자 요한)’입니다만 저는 죽을 ‘사’자가 걸려서 ‘사철’이 대신 ‘수철(프란치스코)’이로 이름을 지었다 합니다. 둘째 형님은 작고하셨고 첫째와 셋째 형님이 현재 암으로 투병 중입니다. 어제는 잠시 병원에 들른 후 대전의 병원에서 입원 중인 셋째 형님을 문병하고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참 편안하다. 고맙다” 라는 말씀과 더불어 한참 동안 말없이 저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야위고 찬 손에 저의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는 듯했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체온 전달의 침묵의 사랑을 원했던 것입니다. ‘참 편안하다.’라는 말마디를 듣든 순간 마침 예수님의 임종어인 ‘다 이루었다.’(요한19,30) 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걱정 가득한 가족들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참으로 평화로운 형님 모습에 제가 위로와 힘을 받았습니다. 그동안에도 전화를 드리면 늘 ‘수도원을 찾는 어려운 사람에게 잘 해주라.’는 진심어린 당부였습니다. 얼마 전 투병 중인 큰 형님을 방문했을 때 역시 말없이 저의 손을 가만히 잡고, ‘고맙다, 고마워’ 연속 말씀하시던 형님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따뜻한 체온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약한 사람들임을 절절히 깨닫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충만한 인생이지만 사랑이 빠지면 허무한 인생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바로...

좋은 명언들 - 4/2011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의 거울이다.(캔 키즈 Jr)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를 모면할 길은 없다. 그러나 불행을 밟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은 언제나 우리에게 존재한다.(발자크)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수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다.(플푸타크) 행복이란 결국 기다림의 다른 말(김재진). 팀워크는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연료다(앤드류 카네기). 노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 그만 먹어야 할 때와 일을 멈춰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해리 트루먼).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타키투스) 성공하기 가장 좋은 장소는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이다(찰스 M. 슈왑).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상처받아도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장영희).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게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 작자 미상,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내용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