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1의 게시물 표시

김수환 추기경님의 인생덕목

1. 말을많이하면 필요없는 말이나온다. 두 귀로많이들으며, 입은세번 생각하고열라. 2. 수입의1퍼센트를 책사는데투자하라. 옷이해지면 입을수 없어버리게되지만, 책은시간이 지나도위대한진가를 품고있다. 3.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 그냥돈을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대로주고사면 희망과건강을선물하는 것이다. 4. 웃는연습을 생활화하라. 웃음은만병의 예방약이자 치료약이며, 노인을젊게하고 젊은이를童子(동자)로 만든다. 5. 텔레비전과 많은 同居(동거)를하지말라. 술에취하면정신을 잃고, 마약에취하면 이성을잃지만, 텔레비전에취하면, 모든 게 마비된바보가된다. 6. 화내는사람이 손해를본다. 화내는사람은 자기를죽이고 남을죽이며 아무도가깝게 오지않아서 외롭고쓸쓸하다. 7. 기도는녹슨쇳덩이도 녹이며 천년암흑동굴의 어둠을없애는 한줄기 빛이다. 주먹을불끈쥐는 것보다 두 손을모으고 기도하는자가더강하다. 기도는 自性(자성)을 찾게하며 만생을유익하게하는묘약이다. 8.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말라. 이웃은 나의모습을 비추어보는큰거울이다. 이웃이 나를마주할때 외면하거나미소를 보내지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앉아 자신을곰곰이 되돌아봐야한다. 9.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 낮춤이선행된다. 사랑이머리에서 가슴으로내려오는 데 70년이걸렸다.

내 마음과 영혼도

내 마음과 영혼도 영혼은 자신을 즐겁게 하는 양식을 먹고 산다. 영혼의 양식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내 영혼도 그렇게 자랍니다. 불평과 불만,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우리 영혼은 그것들을 먹고 그런 사람이 됩니다. 대신 믿음과 사랑과 평화의 양식을 주면 우리 영혼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람으로 자랍니다. 날마다 먹는 음식에 따라 몸 상태가 결정되듯이 즐기는 생각에 따라 내 마음과 영혼도 달라집니다.

오늘 하루

오늘 하루 "오늘 하루만을 생각하며 충실하게 살아 갈 때 우리 삶은 그만큼 가벼워진다. 평생을 어떻게 견디어 낼까 생각하면 힘겨운 것도 오늘 하루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하면 견딜만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하루를 좌우한 것,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하루만 사랑으로 살고, 오늘 하루만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면 삶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내일을 향한 근심 걱정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오늘 마저도 자유롭게 살지 않게 만듭니다. 오늘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오늘의 은총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그러한 은총을 누리고 있다하여 미래에 시련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며 주님의 은총을 맛본 사람은 예고 없이 닥친 시련이나 어려움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4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집회44,1.9-13 마르11,11-25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삶" 오늘은 ‘기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우리 분도회의 모토대로 우리의 우선적일은 ‘하느님의 일(Opus Dei)’인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서비스직인 하느님 찬미가 우리의 주업(主業)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찬미로 하느님을 섬기는 우리들입니다. 집회서의 서두 말씀이 충격으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 옛 어머니들은,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살다가 떠났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을 두고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가끔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어둡고 힘든 절망적 상황에서도 힘껏 믿음으로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삶은 하느님께 순종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사람들 같지만 하느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잊지 않으십니다. 다음 말씀처럼 하느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보답해 주십니다. “그들의 재산은 자손과 함께 머물고 그들의 유산은 후손과 함께 머물리라.”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기도 없이는, 믿음 없이는 이런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앞으로는 기도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 그러니 ‘살기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기도의 교과서인 시편입니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깊은, 우리 일상의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시편기도를 내 기도로 하는 ...

<아래로부터의 권위>

3월 5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마르코 11장 27-33절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오늘 복음의 관건인 권한, 권위에 대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권한, 권위 둘 다 단어 자체로 꽤나 부담을 주는 말이군요. 권한, 권위를 의미하는 ‘Authority’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 ‘Augere'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Augere'란 단어의 뜻은 ‘자라다’입니다. 결국 그 누군가가 지닌 권한, 권위는 한 인간을 더 큰 자유와 정의, 더 큰 진리와 행복을 향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많은 사람이 권위 있는 직책에 올라앉기만 하면 크게 착각합니다. 권한을 자신의 두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물리적인 힘으로 생각합니다. 아랫사람을 내리누르는 통솔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배려와 존중의 수단으로가 아니라 강압적 통솔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참으로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군가에게 권위, 권한이 부여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아랫사람들을 좀 더 사랑하라고, 좀 더 봉사하라고, 좀 더 성장시키라고 권위나 권한이 주어졌는데, 그것을 반대로 악용하여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권위의 행사가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기를 바랍니다. 강압적 일방 통행식이 아니라 이성적, 논리적, 상호적이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위로부터의 권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권위’를 행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베푸셨는데, 그 권한은 군림하고, 섬김 받고, 억압하는 권한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라고, 병자들에게 치유를 선물로 주라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다시 안겨주라고, 결국 봉사하라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권한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사하신 권한 역시 사랑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랑의 권한, 사랑의 권위, 아래로부터의 권위였습니다....

"지혜로운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5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집회51,12ㄷ-20ㄴ 마르11,27-33 "지혜로운 삶" 오늘은 ‘지혜’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1.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 2. 불교에서 미혹을 끊고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이라 소개 되어있었습니다. 분별의 지혜요 깨달음의 지혜임을, 바로 삶의 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여 옛 사막교부들이나 어머님들 배움은 짧았지만 삶의 지혜는 깊었습니다. 종파를 초월해 누구나 추구하는 바가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 고결하고 품위 있고 아름다움 삶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철학(philosophy)의 어원도 의미심장합니다. 철학을 통해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이른다면 철학 또한 신학과 한 형제라 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두 사례가 생각납니다. 난데없이 집무실에 한 부부가 들어와 신부님 결정에 따르겠으니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내용인즉 자기가 보람 있게 활동하는 모임이 있는데 아내가 극구 반대하니 어느 쪽이 하느님의 뜻인지 모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일언지하에 대답했습니다. “부인의 의견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여자의 직감은 현실감각은 정확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부부간의 평화와 일치입니다. 부인의 뜻을 따르십시오. 부인의 의견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구원의 지혜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고맙게도 그 부부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이어 면담 차들어 온 한 형제의 고백입니다. “올바로 열심히 사니까 하느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즉시 형제의 말에 공감하여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올바로, 충실히 살 때 계시되는 지혜입니다. 아니 올바른 삶 자체가 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눈만...

<내 십자가도 크지만>

3월 6일 연중 제9주일-마태오 7장 21-27절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늦은 시간, 한 국철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간이 좀 남아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역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역 안에는 피곤한 얼굴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반, 노숙인 반이었습니다. 한 곳에 긴 줄이 늘어서 있기에 뭔가 싶어 가봤더니,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 다 계셨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잠시나마 속을 따뜻이 하라고 작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제 딴에 그 광경이 너무나 흐뭇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순식간에 준비해온 컵라면이 바닥나더군요. 그러면서 잠시나마 노숙인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습니다. 제 마음도 훈훈해졌고, 저는 한참동안 넋을 잃고 그런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또 한참동안 바라보던 한 노숙인이 자신이 받아든 컵라면을 제게 내밀면서 그랬습니다. “드실래요?” 아니라고, 계속 손사래를 쳤지만, 막무가내로 컵라면을 제게 안겨주고 저 건너편 친구들 있는 곳으로 걸어가시더군요. 그분 눈에 제가 무척이나 불쌍해보였던가 봅니다. 저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그분의 그윽하고 측은한 눈길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자신의 몫, 작은 것이지만 소중했을 텐데, ‘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양보한 그분의 마음이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리장성을 쌓는다든지, 초대형 피라미드를 만든다든지, 전국토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만든다든지 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그리 대단하고 거창한...

말씀의 열매, 영적 변화

이 말씀의 내용은 첫 번째가 치유입니다. 두 번 째가 축복입니다. 세 번 째가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제의 입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전달됨을 믿어야 됩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치유가 이 자리에서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나와 내 가족에게 내렸음을 믿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세례 받으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말씀선포’였습니다. 제자를 먼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세례 받은 자의 첫 번째 일은 말씀선포입니다. 대자 만들려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꽃동네 봉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자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말씀선포입니다. 사제는 강론 준비를 철저히 해야 됩니다. 좋은 강론, 준비된 강론은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성체께로 인도하며 내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저는 신학생 때 선배신부님들의 이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는 미사만 잘 드려주면 돼, 강론은 목사들이 잘하면 되지.” 미사 잘 드리고 강론 잘하면 기가 막힌 사제인데 왜 목사만 강론을 잘해야 될까? 사제만 말씀선포의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백성들은 말씀선포의 의무가 있습니다. 말과 말씀은 분명히 다릅니다.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말씀은 세 가지 열매가 맺어지는데 첫 번째가 영적변화입니다. 말씀을 쏘이면, 말씀을 받아들이면 영적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치유가 일어납니다. 세 번째는 삶이 변화되고 나중에는 우주가 변합니다. 첫 번째, 말씀의 열매는 영적변화라고 했습니다. 그 영적변화의 내용은 사람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옮겨갑니다. 모든 생각을 하느님중심으로 합니다. 이제껏 회개는 내가 죄에 떨어졌다고 하는... 자존심 상하는 것이라 징징거렸지만 말씀을 받아들여 영적변화가 일어나면 하느님 중심으로 후회가 아닌 회개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 하느님을 첫째자리로 옮기는 영적변화...

"하느님 공부"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6 연중 제9주일 신명11,18.26-28,32 로마3,21-25ㄴ.28 마태7,21-27 "하느님 공부"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밥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 하느님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늘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평생화두는 하느님뿐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에 대해 아무리 물어도 하느님 없이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허무에 대한, 인생무상에 답 역시 영원하신 하느님뿐입니다. 하여 인생은 하느님을 공부하는 학교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학교입니다. 알 것 다 알았어도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그 공부는 완전히 헛공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다음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 놓는다.” 바로 오늘 축복과 저주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저주를 택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축복의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축복의 하느님을 선택할 때 충만한 삶입니다. 허무의 어둠은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영원한 평화와 기쁨이 샘솟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하느님 공부’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기위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전 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말고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누구에나 앎의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궁극에는 하느님을 알고 싶고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삶은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고 싶어 하느님 공부, 사람공부입니다. 하느님과 나는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