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0의 게시물 표시

♣삶의 가장 큰 힘♣

♣삶의 가장 큰 힘♣ 우리 몸에 힘이 있듯이 마음에도 힘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음식으로 힘을 얻지만 마음은 생각으로 힘을 얻습니다. 좋은 생각은 마음의 힘이 됩니다 사랑, 희망, 기쁨, 감사, 열정, 용기, 지혜, 정직, 용서는 마음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합니다. 하지만 미움, 거짓, 불평, 의심, 염려, 갈등, 후회는 마음을 약하게 하고 황폐하게 합니다. 나의 자유가 중요하듯이 남의 자유도 똑같이 존중해 주는 사람 존 러스킨은 "마음의 힘에서 아름다움이 태어나고, 사랑에서 연민이 태어난다"고 했고,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힘으로부터 생긴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좋은 생각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삶을 평화롭게 합니다. - 사진 한 장 생각 하나에서-

성공을 위한 13가지 방법(‘좋은 글’ 중에서)

성공을 위한 13가지 방법(‘좋은 글’ 중에서) 1.절제: 몸이 나른해 질 때까지 먹지 말 것. 2.침묵: 필요 없는 대화는 삼가할 것. 3.질서: 물건은 놓아두어야 할 곳에 놓아두고 해야 할 일은 해야 될 때 할 것. 4.결의: 결심한 것은 틀림없이 실천할 것 5.검소: 남이나 자신에 대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경우 이외에는 비용을 들이지 말 것. 6.근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 것. 7.성실: 올바르고 때묻지 않은 생각을 가질 것. 8.정의: 도리에 어긋난 행위나 의무를 게을리 함으로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말 것. 9.온건: 극단을 피할 것. 10.청결: 몸, 옷, 집은 항상 깨끗이 유지할 것. 11.평온: 사소한 일이나 우연한 일로 마음의 평정을 흐트러지게 하지 말 것. 12.순결: 정욕에 빠지지 말 것. 13.겸손: 자기 자신의 장점을 숨길 줄 알아야 할 것.

☆ 기도의 열매는 순결한 마음 ☆

☆ 기도의 열매는 순결한 마음   ☆   기도의 열매는 순결한 마음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가지가 줄기에 연결되어 있지 않듯이 말라버릴 것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순결한 마음입니다. 순결한 마음은 자유롭게 사랑합니다. 일치는 기도와 겸손과 사랑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가치는 우리가 하는 기도의 가치와 비례합니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 믿음의 열매는 사랑, 사랑의 열매는 봉사,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거룩하게 되십시오.우리 모두는 거룩하게 될 능력이 있으며 그 비결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줄 안다면 기도를 사랑케 되겠지요. 기도를 사랑한다면 기도를 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소중하고 힘있는 무기라는 이 기쁜 소식을 우리는 온 세상에 퍼뜨립시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마더 데레사

"용서의 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8.12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에제12,1-12 마태18,21-19,1           "용서의 샘"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니 어서와 조배드리세.”   오늘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처럼, 하느님께 조배드리며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이 힘을 주소서. 힘을 주소서.”(시편90,17).   위의 시편 말씀처럼, 주님의 은총을 간청하며 역시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어제 장시간 면담했던 우울증을 앓는 청년의 다음 고백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생리적인 죽음이전에 희망을 잃으니 그대로 죽음이었습니다.   몸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지니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새삼 희망을 주는 교육, 희망을 주는 정치, 희망을 주는 사회, 희망을 주는 가정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사라질 세상 희망이요, 또 자기 희망대로 보람 있게 사는 이들 얼마나 되겠는지요. 하여 시편에서도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라는 대목이 무수히 나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샘’이자 ‘용서의 샘’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무한한 용서입니다. 요즘 자주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많은 이들이 운명론자들이 되어갑니다. 사람마다 타고 난 운명이 있고 결국 운명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사실 자기 탓 없이 타고난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천성(天性;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 본성), 천재(天才;타고난 재주), 천품(天稟;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품) 등 모두 하늘로부터 타고난 측면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사...

부족함과 행복함(‘좋은생각’ 중에서)

부족함과 행복함(‘좋은생각’ 중에서)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든 그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도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늘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분들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용서 안에 미소 짓고 계신 하느님>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마태오 18,21-19,1 <용서 안에 미소 짓고 계신 하느님>         용서(容恕)란 단어처럼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살다보면 백번 깨어나도, 천 번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인간’, 내 소중한 사랑을 앗아간 그 사람, 나를 지근지근 짓밟은 그 ‘짐승’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용서와 관련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영성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성생활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 더 나아가서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님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독특한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소화불량, 두통, 불면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용서란 중요한 작업을 소홀히 했거나 서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우리는 심리적 정서적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연연하기 시작할 때, 즉시 끔찍한 내면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인간’으로 인해 내가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그 ‘인간’이 내 삶을 ...

"건강한 한 몸 공동체"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8.11 수요일 성녀 클라라(1193-1253) 동정 기념일 에제9,1-7;18-22 마태18,15-20           "건강한 한 몸 공동체"       건강 검진 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새삼 몸의 신비에 감탄했습니다. 겉으로야 단순해 보이는 몸이지만 속은 얼마나 복잡 미묘한지요. 말 그대로 몸의 신비, 생명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몸의 신비입니다.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한 몸 유기체의 몸이니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으며 다 그 고유의 자리와 몫이 있습니다. 하여 교회를 이런 몸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 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그 고유의 자리에서 그 몫을 다할 때 비로소 유기적 한 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 진단표’를 보면서 ‘암’에 대한 설명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암이란 세포의 성장 및 분열을 조절하는 통제 기능이 소실되어   제멋대로 증식하는 세포의 집단을 총칭한다.’ 라는 내용을 읽으며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득 몸에만 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암, 공동체의 암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절망이라면 이런 절망은 영혼의 암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어느 조직의 내부에서 고질적인 장애가 되는 이들을 일컬어 ‘암적이 존재’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통제기능이 소실되어 제멋대로 증식하는 세포집단’, 이 말마디에 유념해야 합니다. 제멋대로 살 때 통제기능이 소실되어 몸의 균형과 조화가 깨져 육신의 암이 생길 수 있듯이, 영혼의 암, 공동체의 암도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통제하는 궁극의 통제자는 누구일까요? 두 말 할 것 없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중심한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우리의 영원한 비전"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8.10 화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258) 축일 2코린9,6-10 요한12,24-26           "우리의 영원한 비전"       우리의 영원한 비전은 하느님이요 그리스도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거니와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고 약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비로소 살 수 있고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화두는 단연코 ‘공동체’입니다. 교육의 두 목표는 ‘더불어 사는 것’과 ‘제 앞가림 하는 것’인데 우선적인 게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제 앞가림의 머리만 있고 더불어 사는 마음이 없으면 공동체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공부는 참 중요하고 힘든 평생공부로 졸업이 없습니다. 공동생활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결국 성경이나 우리 분도규칙도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는 교과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함께 사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늘어나는 혼자 사는 주거 형태의 ‘원룸’인데 참 우려되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인도의 성자라 일컫는 간디의 무덤 표지 석에는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의 사회악’이란 제하에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富),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란 글이 씌어있다 합니다. 말 그대로 얼빠진 사회입니다. 그대로 우리나라 공동체 현실을 가리키는 것 같아 씁쓸한 심정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의 영원한 비전인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공존공생, 공존공락, 공존공빈의 공동체가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공정...

용서의 계절(이해인)

용서의 계절(이해인)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 시간을 알뜰하고 성실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쓸데없이 허비한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함께 사는 이들에게 바쁜 것을 핑계 삼아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못하고 듣는 일에 소홀하며 건성으로 지나친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내가 어쩌다 도움을 청했을 때 냉정하게 거절한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남의 흉을 보고 때로는 부풀려서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전달하고 그것도 부족해 계속 못마땅한 눈길을 보낸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많이 하고 나의 탓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말을 교묘하게 되풀이한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사소한 일로 한숨 쉬며 실망하며 밝음 웃음보다는 우울을 전염시킨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사판, 클라라>

8월11일 수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마태오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사판, 클라라>         성녀 클라라의 삶은 당시 보통 사람들 시선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클라라는 당시 숱한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특급 신부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고정되었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님의 가난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한 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클라라의 삶 역시 사부 프란치스코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복사판’이었습니다. 클라라의 삶은 마치 프란치스코의 삶의 거울과도 같은 삶이었습니다.       두 분이 그토록 가난을 사랑했고, 그 가난을 온 몸으로 살았고, 그 가난에 목숨을 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난은 모든 덕의 배경이더군요.       클라라가 한 평생 하느님께로 시선을 고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클라라의...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는 항상 불안합니다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는 항상 불안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바쁘고 안절부절못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이 시대의 고유한 병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이유로 초대교회 수도생활에서부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 온 ‘마음의 평안을 얻는 길’은 오늘날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주 화제의 대상이 되는 주제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요와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상황에 시달리고 있다. 초대교회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줄인다고 하여 반드시 자동적으로 고요함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내는 것은 하나의 긴 여정이다.   참된 마음의 평안은 자신을 진지하게 인식해 만나야 하며,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하느님을 만나서 마침내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을 안정되게 하시는 유일한 존재인 하느님 안에서 휴식해야 얻을 수 있다.   마음의 평안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 상당한  노력을 요구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길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안식의시간을 가져서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 당신과 함께 마음의 평안을 얻어 누리기를 원하신다.   -「다시 찾은 마음의 평화」중에서-   ♣“하느님이 날 내셨으니, 나는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늘 불안합니다.” 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캉스 계절과 휴가철을 맞이하여 한번쯤 새겨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 휴가는 오히려 마음의 평화가 없는 공허로 가득하기 일쑤입니다.

<심야 비상사태>

8월 10일 화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심야 비상사태>         아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뒤치닥거리 할 일도 많아집니다. 오늘만 해도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갑자기 열이 오른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담당 수사님은 왕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지체 없이 아이를 엎고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같은 시각 다른 수사님 한 분은 며칠 전 출가(?)한 아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수사님 두 분 다 심야에 출동한 관계로 아이들 침실을 둘러보러 기숙사로 갔었습니다. 아이들은 수사님들의 고초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코고는 소리, 잠꼬대하는 소리에 녀석들이 얄밉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행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짜식들, 수사님들은 즈그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는데...잘도 자는구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나마 녀석들 사고 안치고 이곳에서나마 편안히 머리 눕히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다 흐뭇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수사님들의 지속적인 희생, 일상적인 죽음을 통해 아이들이 활짝 꽃피어나고 얼굴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오늘따라 열정으로 뭉쳐진 우리 형제들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아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매일 체험하는 좌절감과 배신감이 상당할 텐데 뜨거운 열정으로 늘 새 출발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

삶은 나에게 일러주었네

삶은 나에게 일러주었네   나에게 없는 것을 욕심내기 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하고 감사히 여기라는 것을 삶은 내게 또 일러주었네. 갖고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기를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내가 가질 수 있고, 가질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여지껏 욕심만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네. '하지만 그 욕심을 잃을지라도, 결행하는 것은 결코 욕심이 아니라고 내 마음이 나에게 이야기하네' 우리는 언젠가 때가 되면, 육신마저 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필요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노력해야 할 것은 사실 얼마만큼 소유할 것인가가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얼마만큼 감사해야 할까 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합니다. 반복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집착도 미련도 버려야 할 것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은 가감이 버리고 새로운 것을 향해 희망찬 행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중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8.9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에제1,2-5.24-28ㄷ 마태17,22-27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임금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고립무원의 고독한 처지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던 모세를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바빌론 유배 중 크바르 강가 고독한 처지에 있던 에제키엘 사제를 찾아오십니다.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 오년에,   주님의 말씀이…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일뿐 아니라 '사람을 찾는 하느님'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고독한 처지라 하여 좌절하지 마십시오.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주님을 체험한 에제키엘의 본능적 반응입니다. 이런 하느님 체험이 내적 힘의 원천이요 꿋꿋이 자기 길을 가게 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매일 미사 중 말씀과 성체를 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루 삶의 이정표와도 같은 미사를 통한 주님의 체험이 우리 삶의 여정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호세14,10ㄴ).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의인들 되어 주님의 올곧은 길을 가게 합니다. 평범한 일과표의 궤도에 충실할 때 바로 올곧은 주님의 길입니다. 창세기 에녹에 관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에녹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