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0의 게시물 표시

어느 날의 커피

어느 날의 커피 - 이해인 -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전호를 읽어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 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 ♣

♣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 ♣ 만일 당신이 장미꽃을 본다면 아름다운 장미에 하필 가시가 달려 있다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당신은 이런 험한 가시덩굴 속에서도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났다고 감탄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한 공간안에 존재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한 장소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과 현상은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변합니다. 아름다운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꽃동네로 보이고 불만스런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안개 자욱한 오염된 도시로 보이는 법입니다. 세상은 전적으로 당신이 어떤 마음의 눈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녹슨 마음을 깨끗이 닦으십시오. 밝은 생각,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아직도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 행복비타민 中에서 =

친절한 부메랑 효과

친절한 부메랑 효과 친절한 태도로 사람에게 끼친 유쾌함은 어디까지 불어서 되돌아오는 법이다. (에덤 스미스) 친절은 사람 사이를 빛처럼 빠르게 이동합니다. 친절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전해집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친절에 대해 무척 민감합니다. 돌같이 단단한 사람도 작은 미소, 부드러운 말 한마디, 진심 어린 몸짓 하나에 금방 부드러워지고 마음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친절과 유쾌함은 회귀 본능이 있기 때문에 어느새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의 마음 밭에 기쁨의 집을 짓습니다. 그것도 이자까지 붙여서 돌아와 더 큰 기쁨의 집을 짓습니다. 오늘은 누구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까? 친절은 단단한 마음을 녹이고 더 큰 기쁨을 만듭니다. <좋은 글>

나는 내가 바꾼다.

나는 내가 바꾼다. 마음의 아름다움을 잃지 마라.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은 향기를 잃기 때문이고, 인간이 늙어 꼬부라지는 것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잃기 때문이다. 몸 따라 마음도 늙어가서는 안 된다. 몸이 흐트러져 있다고 해서 마음까지 흩뜨려져 있어서는 안 된다. 가는 세월 몸으로는 막을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막을 수 있다. 세월 따라 몸이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만은 얼마든지 젊음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고,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마음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성숙시켜 나갈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이 미워지고 추해지는 것은 육체가 늙어가기 때문보다도 마음이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의 야망이나 희망 같은 것은 모조리 잊어버리고 몸과 함께 마음도 늙어가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점점 초라해지는 것이다. 착하고 아름다움 마음이 갖은 세파에 시달리면서 악해지고 인색해지기 때문에 점점 더 세속에 찌들게 되는 것이다. 몸이 늙어갈수록 마음은 더욱 더 고와지고 젊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잃어가는 육체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마음의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보충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운 향기를 꾸준히 간직할 수 있고 늙어서도 추해지지 않을 수 있다. 몸까지 늙어 가는데다 마음까지 늙어가고 미워진다면 인생은 거기서 끝장이다. - 송 천호 <나는 내가 바꾼다.> "제3장 사랑하는 나에게" 에서 발췌 -

-말한마디에 천냥 빛을 갚는 다-

 -말한마디에 천냥 빛을 갚는 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간에 오해가 생기고 불신이 생길 때 한 사람은 추궁하고 한 사람은 벼랑끝에 몰리는 순간 자기의 입장만 거듭 주장하고 변명과 합리화만 되풀이 하여 자기가 살고 상대를 살리는 도리가 있건만 핵심을 잡지 못하고 개념정리가 되지 못하여 지혜로운 말 한마디 구사하지 못하여 자기도 살아나지 못하고 상대방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다. 오로지 말한마디만 잘 하면 난국을 역전시킬 수도 있고 자기와 상대를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건만 빙판에 넘어진 소의 형국이다.   선(禪)에서의 거량도 그러하고 공안문답(公案問答)도 마찬가지로 본연의 정체성(正體性)을 회복하여 문제를 소멸시킨 다음 주체성이라고 하는 칼날로 옵션을 구사하여 자기가 살아나고 상대를 살리고 주위를 살릴 수 있는 살인검 활인검을 구사하는 것이 바로 말 한마디에 천량빚을 갚는 도리다. 이것이 바로 지혜요 선지(禪旨)다.           <옮긴글>

좋은 생각만 가지고 사세요

좋은 생각만 가지고 사세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에 소중한 무엇인가를 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이는 슬픈 기억을 품고 살아갑니다. 어떤이는 서러운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어떤이는 아픈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아름다운 기억을 품고 살아갑니다. 기쁜일을 즐겨 떠올리며 반짝이는 좋은 일들을 되새기며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바로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불만 중 어느것을 마음에 품느냐에 따라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입니다. 맑고 푸른 하늘을 가슴에 품고 살면 됩니다 아름다운 꽃 한송이를 품어도 되고 누군가의 맑은 눈동자 하나, 미소짓는 그리운 얼굴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품고 살면 됩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품고 살면 좋은 삶을 살게될 수 밖에 없습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키 큰 나무 사이를 걷노라니>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 마태오 13,24-30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키 큰 나무 사이를 걷노라니>         고민 많은 한 아이와 산을 올랐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랑비가 내리는 산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 쭉쭉 뻗은 ‘팔등신 미인’ 나무-메타세쿼이아-들을 만났습니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걷노라니 세파에 허물리고 휘어졌던 마음이 다시 서는 느낌이었습니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저 나무들, 저토록 높이높이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견뎌왔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짠해왔습니다.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 엄청난 인내심을 잘 표현하는 복음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순간 마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죄하시고, 인간의 기를 꺾어놓는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심판 앞에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우리가 어떠하든 그저 묵묵히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도 참아내시는 분, 우리의 악행을 끝까지 견뎌내시는 분, 우리의 불효를 끝끝내 인내하시는 분,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 ...

"항구한 기도" - 7.2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7.25 연중 제17주일 창세18,20-32 콜로2,12-14 루카11,1-13           "항구한 기도"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건강검진 수속을 받던 중, 벽을 보니 ‘건강증진센터(health promotion center)'글자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참 좋은 명칭이다 싶었습니다. 여기서는 주로 육신의 건강상태를 점검하지만 심리검사를 통해서는 정신의 건강상태를 점검합니다. 참 복잡한 사람입니다. 육신의 건강 못지않게 중요한 정신건강입니다.   육신과 정신건강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영혼건강이 더해져야 온전한 건강입니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영혼건강일지도 모릅니다. 영혼이 어두우면 곧 정신도 육신도 어두워집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건강하십니까? 정신은 건강하십니까? 육신은 건강하십니까? 영혼이 건강해야 정신이 건강하고 정신이 건강해야 육신도 건강합니다. 바로 이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여 저는 나름대로 인간 본성을 영성(靈性), 인성(人性), 수성(獸性), 마성(魔性)으로 분류하며 영성을 맨 윗자리에 둡니다. 마침 병원의 대기석 한쪽 벽면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글자가 메마른 마음을 위로와 평화로 촉촉이 적셨습니다.   “치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영혼, 정신, 육신건강을 총괄하는 최고의 의사는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영혼건강을 관장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여기 수도원 성전을 일명 ‘영적건강증진센터(spiritual health promotion center)’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미사은총으로 영혼의 치유에 뒤따르는 정신치유, 육신의 치유입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고 건강하게 하십니다.     ...

"공존(共存)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인내" - 7.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7.24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예레7,1-11 마태13,24-30           "공존(共存)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인내"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순전히 밀밭 같은 마음이나 공동체는 환상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세상이요 교회요 수도원입니다. 사실 밀과 가라지가 적당히 공존하는 것이 밀에도 좋습니다. 적당한 병이 몸의 건강을 지켜가게 하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독서(2코린) 중 생각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언제나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갈 때 가라지 세력에 압도되지 않고 독야청청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삶은 전쟁입니다. 선과 악의, 밀과 가라지의 전쟁입니다. 가라지를 뽑는 것이 어떻겠느냐 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주님의 깊은 통찰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가라지 세력은 절대로 뿌리 뽑을 수 없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힐 수 있습니다. 녹을 지우려다 그릇까지 깰 수 있습니다. 장점과 단점, 선과 악은 함께 엉켜 있어 식별하기도 힘들거니와 뽑는 것은 더욱 힘듭니다. 도대체 누가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우파가 보면 좌파가 제거의 대상인 가라지일 수 있고, 좌파가 보면 또 우파가 제거의 대상인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라...

"끊임없는 내적쇄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7.23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예레3,14-17 마태13,18-23 "끊임없는 내적쇄신" 돌아가는 시국을 보면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역사의 퇴보처럼 느껴집니다. 최첨단 문명의 시대에 여전히 활개 치는 무법, 불법, 폭력의 야만입니다. 모든 문제는 인간의 문제로, 결국은 내 문제로 직결됩니다. 역사의 진보는 결국 인간의 진보로 직결되는데 참 변하기 힘든 게 사람 같습니다. 끊임없이 내적성장, 내적성숙을 말하는 데 늘 제자리 걸음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밖에서 변화를 추구할 게 아니라 내 자신부터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네 탓이 아닌 내 탓에서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 토양이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대부분 학자의 의견이 일치되며 이 해석 또한 예수님의 의중을 반영합니다. 초점은 말씀의 씨앗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옮겨집니다. 길바닥 같은, 돌밭 같은, 가시덤불 속 같은 마음 밭이라면 아무리 좋은 말씀의 씨앗이라도 풍성...

"존재의 향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7.22 목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아가3,1-4ㄴ 요한20,1-2.11-18 "존재의 향기" 아침 성무일도 독서(2코린) 중 마음에 와 닿은 구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빛이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바로 우리의 보화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입니다. 관계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관계의 단절이 지옥입니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관계의 깊이는 삶의 깊이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평생을 부부로 살아도 남남의 무관한 관계로 살 수 있듯이 평생을 살아도 하느님과 남남의 무관한 관계로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빨고 빨아도 속옷에서 나는 체취이듯, 하느님과 관계가 깊어지면서 우리 존재에서 나는 하느님의 냄새, 하느님 향기입니다. 바로 우리 존재의 향기는 바로 하느님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렇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한 송이 꽃 같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아마 마리아 막달레나보다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던 제자들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 비잔틴 전례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라 부릅니다. 자기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신 주님을 평생 따랐던 성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