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10의 게시물 표시

좋은 행복을 위한 일곱 걸음

좋은 행복을 위한 일곱 걸음 첫째 걸음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둘째 걸음 다른 사람의 말에서 진실한 의미를 찾을 줄 알아야 한다. 혼자 힘들면 멘트를 구할 수 있다. 셋째 걸음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크고 정직하게 들어야 한다. 넷째 걸음 환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멀리 보아야 한다. 다섯째 걸음 이상과 현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여섯째 걸음 편함보다는 고생을, 물질보다는 마음을, 과거보다 미래를, 상대적 가치보다는 절대적 가치를 택해야 한다. 일곱째 걸음 중요한 선택일수록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 " 행복한 동행 "에서 ☆

꽃 마음으로 오십시오 / 이해인

꽃 마음으로 오십시오 / 이해인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고운 자리에 꽃처럼 순하고 어여쁜 꽃 마음으로 오십시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꽃 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꿀벌과 나비와 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꽃이 좋아 밤낮으로 꽃을 만지는 이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 마음으로 오십시오 열매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 마음으로 오십시오 - "사계절의 기도" 중에서 -

파도여 당신은 - 이해인

파도여 당신은 - 이해인 파도여 당신은 누워서도 잠들지 않는 바람의 집인가 어느날 죽어 버린 나의 꿈을 일으키며 산이 되는 파도여 오늘도 나는 말을 잃는다 神의 모습을 닮아 출렁이는 당신이 그리 또한 태연한가 사랑하지 않고는 잠시도 못견디는 시퍼런 고뇌의 당신이 언젠가 통재로 나를 안을 하느님 파도여 당신은 누워서도 잠 못드는 기다림인가

살아온 삶, 그 어느 하루라도...

살아온 삶, 그 어느 하루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온 삶의 단 하루, 지우고 싶은 날은 없습니다. 아무리 아픈 날이었다해도 지우고 싶은 날은 없습니다. 그 아픔 있었기에 지금 아파하는 사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며 그 아픔 있었기에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온 모든날 그 어지러웠던 날들도 단 하루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누가 혹시 아픔과 슬픔속에 고통을 잊으려 한다면 지우개 하나 드릴 수 있지만 고통의 날을 지우려 한다면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고통의 날이 얼마나 소중한 날이었는지 아시게 될거예요. 지나고 나면 그래서 제가 지우개를 드린 걸 원망하게 될거예요. 가만히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모든일이 소중한 것처럼 가만히 지나간 날을 생각해보면 모든 날중 단 하루도 지우고 싶은 날이 없습니다. 지금 또한 소중한 날들 중의 하나가 또 지나가고 또 시작 되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과 감사한 날들만 우리 생의 달력에 빼곡히 남게 됩니다 -엔젤트리 느린날의 행복 편지 중에서-

♤- 손가락 기도 -♤

♤- 손가락 기도 -♤ “엄마, 기도는 어떻게 해요?”라고 꼬마가 묻자 지혜로운 엄마는 다섯 손가락을 보여주며 “기도는 이렇게 손가락을 꼽으면서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엄지손가락,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손가락. 자신을 포함해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기도. 가족 친구 이웃 등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뜨거운 심장으로 하는 기도.  집게손가락, 무엇을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 선생님 경찰관 법조인 항해사들을 위한 기도. 미래의 방향을 위해 하는 기도.  가운뎃손가락, 가장 긴 손가락.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나 지도자, 어른과 윗사람들을 위한 기도. 또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   약손가락, 가장 힘이 없는 손가락. 병들어 있거나 슬픈 일을 당해 힘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새기(끼)손가락, 가장 작은 손가락.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장애인이나 불우 노인들을 위한 기도. 막내 동생이나 어린아이를 위한 기도.

모든 길은 처음부터 닦인 길이 아닙니다.

모든 길은 처음부터 닦인 길이 아닙니다. 인생길뿐이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의 길도 신과 나와의 길도 처음부터 잘 닦인 길은 아닙니다. 울퉁불퉁 자갈길을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다리에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가다 보면 어느덧 향기로운 꽃길이 됩니다. 그 향기는 누구와도 차별되는 그 사람만의 향기인 것입니다. 세상에 갈등 없이 얻어지는 보화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향기 없는 조화처럼 무의미할 뿐입니다. 가다 넘어지고, 그만둘까 회의가 들고, 의미 없어 갈등하면서 그래도 가는 반복 속에 그 위대함이 있습니다. 가다보니 어느덧 산에 오른다고 했습니다. 작은 일도 반복하다 보면 큰 것을 이룹니다. 사소함 속에 위대함이 있고 다양함 속에 내 존재가 빛납니다. 처음 걸었던 지나온 길만 생각한다면 세상을 원망 하게 되고 세월을 원망하고 더불어 같이 지나온 주변 사람을 원망하게 되어 내게 돌아오는 건, 미련과 후회 갈등과 원망 야속함만 남게 되어 마음의 병만 커질 뿐 현실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훌훌 털어 버린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향기로운 꽃길 속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대 지금 어디에" 중에서-

<권위를 행사하되 맛들이지 말아야>

5월 29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 마르코 11,27-3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권위를 행사하되 맛들이지 말아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든지 권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간사회는 불가피하게 권위의 행사를 필요로 하고 어쩔 수 없이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권위는 때로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누군가 위에 군림한다는 것은 꽤 괜찮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의할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권위를 행사하되 권위에 맛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위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뿐입니다. 세상 역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왜곡된 권위는 자신도 망가트릴 뿐만 아니라 이웃도 괴롭히고, 공동체 전체를 힘들게 만듭니다. 교회 봉사자로서 목숨 걸고 끝까지 배척해야할 것이 쓸데없는 권위주의입니다.     관료 사회 안에서 늘 염두에 둬야할 요소가 ‘권한’ 문제입니다. 군대생활이나 직장생활도 마찬가지겠지요.     ‘내 권위가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 인가?’를 잘 파악하고 처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괜히 멋모르고 ‘나대다가’ 남의 영역을 침범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뛰어넘어 권위를 행사하다가는 ‘직권남용’으로 쇠고랑을 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는 직속라인, 그래서 내가 목숨 걸고 줄을 잘 서야 하는 직속 라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권한 문제를 가족구성원들 간이나 교우관계 안에서, 또는 신앙생활이나 교회 안에서까지 똑같이 적용하려한다면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모든 권한이나 권위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시...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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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어지는 가슴이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티끌이 있었다면 용서 하시고 앞으로 해나갈 내 사랑은 맑게 흐르는 강물이게 하소서 위선보다는 진실을 위해 나를 다듬어 나갈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바람에 떨구는 한 잎의 꽃잎으로 살지라도 한 없이 품어 안을 깊고 넓은 바다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바람 앞에 쓰러지는 육체로 살지라도 선 앞에서는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하소서 철저한 고독으로 살지라도 사랑 앞에서 깨어지고 낮아지는 항상 겸허하게 살게 하소서 - 좋은 글 중에서 -

"생명의 공간 -비움(kenosis)의 영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5.28 연중 제8주간 금요일 1베드4,7-13 마르11,11-25             "생명의 공간 -비움(kenosis)의 영성-"       꽃향기, 생명의 향기, 하느님의 향기 가득한 성모성월 5월의 신록의 자연 공간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의 공간’ 자체이십니다. 어제 있었던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평화의 집’ 피정 집에 피정 온 어느 자매를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텅 빈 피정 집에 들어가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고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 하는 탄성과 더불어 순간 자매님의 얼굴이 환해졌고 아주 편안해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쾌적한 피정 집 공간, 잘 정돈 된 방, 창밖의 아름다운 신록의 풍경이 자매님을 마음 넉넉하고 푸근하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본능적으로 공간을 갈망하는 사람들임을 절감했습니다. 공간은 생명을, 자유를, 평화를, 사랑을 뜻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텅 빈 생명의 공간 자체입니다. 하느님 생명의 공간 안에 살아가는 뭇 중생들입니다. 마치 한 발 짝 뒤로 물러나 넉넉한 공간을 마련해 준 산 같은 배경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처럼 넉넉한 자유와 생명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지도자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옛 수도자들은 텅 빈 생명과 자유의 공간 자체이신 하느님을 찾아 광활한 사막에 갔습니다.   쾌적한 피정 집 공간에 탄성을 발하며 좋아하는 자매님을 보는 순간, ‘아, 나도 이런 텅 빈 공간이 되고 싶다. 모두가 편안히 쉴 수 있는 생명과 자유의 공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여기 수도원을 찾는 까닭도 아마 신록으로 빛나는 넓은 자연 공간 안에 자리 잡은 수도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생명 가득한 신록의 자연 공간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평화를 줍니다. ...

기도는 영혼의 음식

기도는 영혼의 음식   기도는 마치 우리가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 생명을 위한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약해지고 굶어 죽게 되듯이 은총의 문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신 적으로 점점 쇠약해지고 병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영신 생명에 생기는 주는 영성 생활의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만이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만이 사랑의 생활이고 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생활입니다. - 묵상기도와 성체조배 중에서 -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

5월 30일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 - 요한16,12-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     몇몇 아픈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제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앓아누워 있던 제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해주시던 모습 말입니다. 용돈에는 꽤 인색한 '짠순이'였던 어머니께서 아픈 순간만큼은 앞뒤 재지 않고 팍팍 쓰셨습니다. 고열에 시달리던 제 머리맡에 앉으셔서 당시 구경조차하기 어려웠던 달걀 프라이라든지 복숭아 통조림을 먹여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꾀병을 앓게 됐는데 그런 때 어머니는 꾀병인지 아닌지를 귀신같이 알아맞히셨습니다. 그런 날 복숭아는커녕 단단히 기합만 받았지요.     저희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 그간 세상에서 받아온 상처가 만만치 않은 아이들입니다. '짠한' 마음에 저희들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그들의 상처 입은 날개를 치료해주고 싸매주고자 노력하지만 한계를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이 아픈 순간, 외로워하는 순간, 괜찮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해지는 순간, 그래서 만만한 저희에게 무례함을 느낄 정도로 맹렬히 반항하는 순간에는 저희보다 어머니의 그 섬세함, 부드러움, 따뜻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주어도주어도 더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시 뭔가 아쉽고, 뭔가 모자라는 것만 같아 허전해 합니다.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가련한 우리 인생을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조금이라도 더 사랑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그 결과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하느님께서 성삼위(聖三位)로 존재하시는 ...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5.29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유다17,20ㄴ-25 마르11,27-33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지혜는 물과 같습니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민심은 천심이자 지혜입니다. 민심은 물과 같아 거센 파도가 될 때 불의한 권력도 뒤 엎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신이 지혜롭기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질문은 참 대답하기가 힘듭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올가미에 걸려들겠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성전정화 사건에 불만을 품고 달려드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합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왔다 하고 싶어도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이 두려워 “모르겠소.” 대답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입니다. 군중과 함께 민심에 따라 물처럼 지혜롭게 사셨던 주님의 답변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이런 실천적 지혜는 자연스럽기가 바로 물과 같습니다.   노자도덕경 4장에 나오는 다음 글이 참 좋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더불어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   사람이 사는 데는 땅이 좋다.   마음은 연못처럼 깊은 것이 좋다.   벗을 사귀는 데 있어서는 어진 것이 좋다.   말을 할 때는 믿음이 있어야...

지내놓고 보면 모두가 그리운것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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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놓고 보면 모두가 그리운것 뿐인데... 그때는 뼈를 녹일 것같은 아픔이나 슬픔이였을 지라도 지나고 보면 그것마저도 가끔은, 가끔은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견디고 살았던가 싶을만치 힘들고 어려웠던 일도 지금 조용히 눈을 감고 그때를 추억하다가 보면 더욱 생생하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 어찌 생각해보면 이시간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 서있다 할지라도 결코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다는 뜻이 아닐런지요 가진 것의 조금을 잃었을 뿐인데 자신의 전부를 잃었다고 절망하는 것은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보지 못함이요 남이 가진 것을 조금 덜 가짐에서 오는 욕심이며 비워야 할 것 들을 비우지 못한 허욕 때문이며 포기와 버림에 익숙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의 기도는 참으로 절실하고 소박합니다. 비록 평생 일어서지 못한다 할지라도 살아 숨쉬고 있슴 그 하나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고 살아 있슴 그 하나만으로도 더없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게됩니다 남의 가슴에 들어 박혀 있는 큰아픔 보다 내 손끝에 작은 가시의 찔림이 더 아픈 것이기에 다른 이의 아픔의 크기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더 이상 자신만의 생각과 판단으로 스스로를 절망의 늪으로 밀어넣는 일은 말아야 합니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아쉬움도 많았고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한 시간이였을지라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 날의 새로운 소망이 있기에 더 이상은 흘려보낸 시간들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려하지 마십시요. 아픔없이 살아온 삶이 없듯이 시간속에 무디어지지 않는 아픔도 없지 않답니다. 세상을 다 잃은듯한 아픔과 슬픔마저도 진정 그리울때가 더 많이 있답니다. 병실에서 아스라히 꺼져가는 핏줄의 생명선이 안타까워 차라리 이순간을내 삶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기억마저도 그런 모습이라도 잠시 내곁에 머물 수 있었던...

자기 수련

자기 수련 자기 수련은 내적인 자유의 훈련이다. 자기 수련을 통해 수련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화를 내지 않으면서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우리는 상처와 비틀림으로 점철된 존재만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연구하며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고 내적인 자유를 연습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수련의 한계를 인식해야만 한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우리에게 이로운 정도定度를 발견해야만 한다.  초기 수도승들은 모든 지나친 것들이 악마에게서 온다고 생각했다. 수련은 때로는 식욕, 지식욕, 대화, 활동 등의 포기 또는 제약과 관련이 있다. 자기 수련은 우리가 자유롭게 어느 정도 먹고 마실 것인지, 언제 어떻게 말할 것인지, 어느 정도 일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자기 수련은 우리에게 외적인 것에 의해서 '살아지는' 대신에, 우리 스스로 '산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의해서 강요당하는 대신, 삶의 한계를 결정한다. 자기 수련은 자기 망각, 봉사 정신, 이웃 사랑, 하느님, 선행 그리고 자비를 위한 열린 마음처럼, 긍정적인 행동을 연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행동은 우리에게 이롭다. 자기 수련을 하고 싶어하는 덕성은 우리의 삶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고, 우리가 살아갈 능력을 갖추기 위한 조건이다. Buch der Lebenskunst 「삶의 기술」 안셀름 그륀 지음/ 안톤 리히테나우어 엮음 이온화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

♥믿음은 자신의 삶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이다.

♥믿음은 자신의 삶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이다. 미덕美德의 사슬은 믿음에서 시작한다. 믿음은 자신의 삶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이다. 믿음에서 미덕, 유능함, 힘이 나온다. 믿는 사람은 다르게 살 수 있다. 즉, 더 많은 것을 의식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갖춰서 살 수 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그 안에서 솟아 나오는 하느님의 샘,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에게는 결코 힘이 부족하지 않다. 미덕과 힘에서 인식, 즉 영지靈智가 흘러나온다. 여기서 영지는 실재를 올바르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실재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생각하신 그대로 보는 것을  뜻한다. 영지란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잘못된 표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올바르게 보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당시 사람들도 영지가 말하는 깨달음을 갈망했다.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에서

삼위일체 대축일 - 사랑이신 주님 제게 오소서!

†찬미예수님 여러분들, 제 이름 석자를 아시지요? 성은 김이요, 이름은 웅열 제가 세상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신자들은 저를 보고 ‘토마스신부님’ 친가에 가면 동생들이 나를 보고 ‘형’ 아니면 ‘오빠’하고 불러요. 神父 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Father’   아버지라는 뜻 입니다. 신자들은 사제인 저를 보고 ‘아버지’라고 불러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제가 사제이기 전에 아들입니다. 사람이 없을 때 우리 어머니는 ‘토마스’ 이렇게 부르십니다. 그전에는 ‘신부님’ 꼭 그러셨는데 내가 싫다고 그랬어요. 엄마가 자식한테 무슨 ‘신부님, 신부님’ 합니까? 그냥 ‘토마스’ 하고 부르세요. 그러니까  김웅열이 사제도 되고, 동생들한테는 오빠나 형님도 되고, 부모님한테는 자식도 되는 거예요. 아버지라고 하는 존재가 있어요. 그 양반은 직장에 가면 사장도 되고, 부사장도 되고, 과장님도 되요. 또 자식한테는 아버지라고 불려요. 부인한테는 남편이 되요. 하느님이 몇 분이시죠? 세 분? 말 잘하세요. 하느님은 한분이시지만 위격은 3위 예요. 내가 사제요, 오빠요, 아들이듯이... 하느님은 한분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삼위일체적인 사랑입니다. 성부의 창조적인 사랑/ 성자의 구원의 사랑/ 성령의 성화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創造)와 구원(久遠)과 성화(聖化) 라고 하는 三位一體적인 모습 으로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나죠? 하느님이 삼위일체적인 삶을 살았듯이 우리들의 삶도 세례 받는 그 순간부터 삼위일체적인 삶을 살아야 됩니다. 聖父는 무슨 사랑을 보여주셨다고 그랬어요? 성부가 사랑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듯이 크리스천 역시 성부의 재창조사업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참여해야 됩니다. 성부의 재창조사업 첫 번째, 자녀 출산입니다. 요즘 결혼은 하는데 아이들을 갖지 않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도 철저하게 산아 제한을 합니다. “신부님 요즘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