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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11/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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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11/6/2026=[(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026년 6월 11일 목요일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홍) Memorial of Saint Barnabas, Apostle] 오늘 전례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디 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입당송 사도 11,24 참조 이 성인은 복되어라. 사도들의 대열에 든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이었네. 본기도 하느님, 믿음과 성령으로 가득 찬 복된 바르나바를 뽑으시어 여러 민족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하셨으니 그가 굳은 신념으로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희도 말과 행동으로 충실히 선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1,21ㄴ-26; 13,1-3 그 무렵 21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10/6/2026== 영적전쟁 “영적승리의 삶; 순수와 열정의 사랑”

  2026.6.10.연중 제10주간 수요일                                                                    1열왕18,20-39 마태5,17-19   영적전쟁 “영적승리의 삶; 순수와 열정의 사랑”   “주님께 아뢰오니,  ‘당신의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또 없나이다.’”(시편16,2)   해마다 6월 이맘때쯤이면 수도원 곳곳 어디나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줄기차게 끊임없이 담벼락, 나무, 바위 타오르고 위로 하늘 향해 뻗어나갑니다. 자주 인용했던 오래전 담쟁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28년전 시이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담쟁이는 여전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기쁨이자 행복이요 충만이자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한 계속되는 영적전쟁입니다. 평화를 원하...

양승국 신부님 ===10/6/2026==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작은 사람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여겨 들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고 대단한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여기심을 잘 드러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 사람들 시선에 작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사람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환자들, 노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사람들 눈에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직무들, 일상의 작은 봉사, 설거지, 쓰레기 분리 수거, 배수로 청소, 담당 구역 청소...등등을 별것 아닌 일,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고 적당적당히 넘겨버리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살아보니 확실히 느끼겠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소중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 일을 이룹니다. 큰 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대통령이나 대도시 시장, 교구장이나 관구장이 해내는 일들을 홀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은 큰 틀만 짜고, 방향한 제시합니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고무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일은 작은 사람들이 해냅니다. 그들의 협조와 헌신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물도 창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10/6/2026==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변 하나 정리를 못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

빠다킹 신부님 ===10/6/2026=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026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언젠가 아주 난처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쪼그려 앉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가 일어나는 순간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터진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지가 터졌다고 이제 쓸모가 없다며 벗어 던지고 팬티만 입고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터진 부분을 가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옷핀을 사다가 터진 부분을 메웠습니다. 이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이 바지를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실과 바늘로 터진 부분을 꿰맸습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고쳐 쓰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고가의 만년필이 있습니다. 이 만년필이 어느 날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고장 났다고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어떻게든 고치려고 온 힘을 기울였고, 현재 잘 고쳐서 잘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고쳐서 잘 쓰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구원의 길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완성한다’의 그리스어는 원래 빈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듯 ‘가득 채우다’,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그릇을 깨뜨리러(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진정한 의미를 가득 채우려 오셨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규정 준수에 얽매여 있는 율법을,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율법을 원래의 ...

이 영근 신부님 ===10/6/2026===='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맨 먼저 하신 일은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선에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일에 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구마를 하시면서 정결례 법을 어기시고, 또 단식법을 어기셨고, 뿐만 아니라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셨고, 죄를 용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겉으로는 ‘율법의 파괴자’처럼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던 율법을 본래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 (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

함 승수 신부님=10/6/2026==[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 5,17-19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 5,17-19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하면 율법에 얽매이거나 허례허식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떠올립니다. 그건 그 당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정결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죄인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이 자기들을 옭아매어 힘들게 만드는 율법이라는 ‘멍에’를 없애주러 오신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졌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시니,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어리둥절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배신감도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건 율법조항의 가짓 수를 늘리거나, 율법을 적용하는 원칙을 더 엄격하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율법을 왜 주셨는지 그 ‘이유’와 ‘뜻’을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을 그저 ‘글자 그대로’ 지키는데에만 연연함으로써,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괴롭고 부담스러운 ‘족쇄’처럼 여겨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타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딱딱한 글자로 새겨진 율법의 차가운 정의에,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율법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율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금지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건 그들이 당신께서 바라시는대로 올바른 길을 잘 걸음으로써 구원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십...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10/6/2026=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길을 걷게 됩니다.

  경제 이론 중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지혜입니다. 한곳에 모든 것을 투자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손실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산 투자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은행에서도 고객의 투자 성향을 묻습니다. 공격적인 투자도 있고, 안정적인 투자도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안정적인 투자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분산할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하나 정해야 길을 안내합니다. 목적지를 여러 곳으로 설정하면 결국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조금, 세상도 조금 붙잡으려 하면 결국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한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오직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고,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숫자로 보면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의 차이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힘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미국과 이란 사이의 충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군사력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다시 협상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

오늘의 그림과 말씀 묵상 =10/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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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10/6/2026=[(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026년 6월 10일 수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녹) Wednesday of the Tenth Week in Ordinary Time] 제1독서 <이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8,20-39 그 무렵 아합 임금은 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바알의 예언자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였다. 21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십시오. 그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골라 토막을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게 하십시오. 나도 다른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24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황소 한 마리를 골라 먼저 준비하시오. 당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마시오.” 26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