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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1/5/2026==[(백) 노동자 성 요셉]

  2026년 5월 1일 금요일 [(백) 노동자 성 요셉] 오늘 전례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다. 목수였던 성인은 오늘날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다. 제1독서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26─2,3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4-15.17.23-24 형제 여러분, 14 모든 것 위에 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1/5/2026==[(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2026년 5월 1일 금요일 [(백) Friday of the Fourth Week of Easter]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화답송 시편 2,6-7.8-9.10-11(◎ 7ㄷ) ◎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또는 ◎ 알렐루야. ○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 ○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부수고, 옹기그릇 바수듯 바수어 버리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30/4/2026==섬김과 환대, 겸손의 사랑 “예수님의 가르침”

  2026.4.30.부활 제4주간 목요일                                                                    사도13,13-25 요한13,16-20   섬김과 환대, 겸손의 사랑 “예수님의 가르침”   “주님의 자애를 영원토록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세월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2014년 새 원장이 뽑혔고, 원장직을 내려 놓은 저는 안식년을 가졌고, 시간은 강물같이 흘러 12년 후 어제 또 새 원장이 뽑혔습니다. 앞으로 12년이 지나면 제 나이 90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오래 전 “흘러간 것들에”란 자작시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그렇다  시간은 흐른다  흘러간 것들에 마음 아파해하지 말자  아쉬워하지 말자  쓸쓸해하지 말자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흘러간 사람은, 사랑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는 것은 과거가 아니고 오늘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을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오늘을 사는 것이다  오늘 여기서 만나는 사람에, 사랑에, 시간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게 영원한 현재를, 젊음을 사는 길이다  흐르고 흘러도  ...

김찬선 신부님 ===30/4/2026== 편의주의적인 믿음과 실천

  “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이 말씀을 남에게 얘기하는 것은 쉬우며 , 객관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쉽다는 것 말입니다 .   사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고 게다가 내가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에 객관적으로 얘기하고 남에게 얘기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고 쉬운 법입니다 .   저로 말하면 제가 주님의 종인 것은 알고 인정해도 종노릇 하는 것은 싫고 , 그래서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기보다는 아버지로 섬기고 싶습니다 . 하느님을 주 하느님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하고 싶은 겁니다 .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 내가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고요 .   이것이 바로 저의 편의주의입니다 .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 편의주의요 , 주 하느님은 불편하니까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하는 편의주의입니다 .   그러니 아버지 하느님도 엄하신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요 , 심판관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   물론 한 탈란트를 땅에 묻은 종처럼 하느님을 모진 분으로 알고 믿기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 믿는 것이 낫겠지요 .   그런데 저에게 일생 문제인 것이 바로 자비로우신 분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렇게 믿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점이고 , 경외심이 없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점입니다 .   제 생각에 경외심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은 무서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비로운 사람을 존경심 까닭에 더 두려워하는데 그것이 경외심입니다 .   그리고 그것은 벌을 받을...

양승국 신부님 ===30/4/2026===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함을 선택하신 주님!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함을 선택하신 주님!   유학 시절 첫해 성 주간을 이탈리아 한 교구에 가서 주임 신부님 사목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도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부활절을 앞두고 꽤 많은 사람이 고백성사를 보더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은 사목은 주임 신부님과 구역을 나눠 본당 내 모든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서 가정 축복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초대형견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대환영을 받습니다.    거기 할머니들도 우리 한국의 할머니들 못지않게 인정이 많아, 축복 예식을 마치고 나올 때, 꼬깃꼬깃 접혀있는 쌈짓돈을 찔러주시곤 했는데, 주임 신부님 엄명에 따라 모두 모아 본당 사무실에 드리곤 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제가 사목 보조하던 본당에 유명하신 추기경님이 방문하셔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미리 발씻김 예식에 참여할 신자들 열두명을 선발해서 의자까지 다 셋팅해놓았는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한 분이 안나타났습니다.   주임 신부님의 눈짓으로 엉겁결에 제가 부랴부랴 비어있는 한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난꾸러기였는데, 동짓날 어머니께서 큰 가마솥에 팥죽을 쑤고 계셨는데,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왼쪽 발이 펄펄 끓는 솥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큰 화상을 입었고, 아직도 그 상흔이 크게 남아있습니다.   제가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는데, 상처도 크고 너무 부끄러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훌륭하신 추기경님께서 제 발을 그냥 적당히 씻는 것이 아니라 아주 뽀득뽀득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추기경님께서 제 발에다가 입까지 맞추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부끄럽고,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

빠다킹 신부님 ===30/4/2026=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존재 차체에 의미를 가지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26년 4월 30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삶에 감사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이 크게 보이면서 사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지를 계속 생각했었습니다. 부모님께 따지고 싶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어요?”라고 말입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부족함을 안고 태어나 앞으로 계속 힘든 삶을 살 것만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아마 이때가 사춘기 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성당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떠했을까요?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고민이 해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더 힘든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무엇이든 다 부정적으로 보였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행동과 선택을 통해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먼저 존재한 다음에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의해 우리는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사랑 때문입니다. 존재하지 않음보다 존재함이 더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자기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 이렇게 우리는 계속 성장하게끔 맞춰 있습니다. 그런데 멈추려는 나약함이 자주 등장합니다. 다시 마음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요 주님이시면서도 종의 모습으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라는 말씀은,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아지셨으니,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적이고도 강력한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아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제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

이 영근 신부님 ===30/4/2026==섬김을 배우는 방법

  <섬김을 배우는 방법>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이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고 실천하는 이’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섬김의 도’는 ‘실행하는 이’만이 배울 수 있는 ‘도’(깨달음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배우는 방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섬기면서 섬김을 배우고,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용서하면서 용서를 배우는 ‘실천을 통해’ 배우는 방법입니다.  마치 수영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수영을 배울 수 없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서는 결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실천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