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존재중심' 의 삶

아이들을 참 풍요롭고 밝게 키워 낸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남편을 잃고 혼자되어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정도로가난하였지만
아이들은 매우 밝았으며 그늘진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공공버스를 탈 때마다"이건 우리 차야.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거란다."하고 말했고 산과 들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마련해 주셨단다. 우리는 얼마나 부자인지 모른단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비록 물질적으로 빈곤했지만 늘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면서
아이들에게 척박한 세상에서도 늘 선한 의지를 갖도록 해주고 세상을 풍요롭게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물질적 소유가 최고가치가 된 이 시대에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어머니를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정이 결핍을 가지고 있지만 어머니가 하느님 안에서 믿음과 희망을
심어 준이런 아이들은 세상의 어떤 풍파가 닥쳐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빈곤 속에서도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 줄 알고 반대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가난한 마음을
가질 줄 알 것입니다. 삶의 깊은 곳에 흐르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늘 깨닫고 살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생존 양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지요.
그는 재산이나 지식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며 자기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 중심' 의 삶과
나눔과 베풂을 삶의 가치로 여기며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중심' 의 삶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소유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자체가 자신의 존재가 됩니다.
이런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늘 두려워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이해관계로 보기 때문에
방어적이며 가혹해지고 결국 스스로 외로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중심' 의 삶은 베푸는 삶
더불어 사는 삶 곧 너와 나 모든 존재를 하나로 만듭니다.

참된 행복은 자기가 가진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 것으로 바라보며
함께 누리고 나누는 데서 나옵니다.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묵상글>

인생의 멍에 /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주님, 또 한 분의 교우를 주님께 보내 드립니다.

이 사람이 살아온 시간 동안 지은 죄는 묻지 마시고

그가 살아 내야 했던 삶의 멍에만 생각해 주십시오.

설령 그가 주님께 충실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운명처럼 부여된 삶의 멍에를 한평생 지고 살아 냈다는 그것만으로

그는 아름답고 위대해 보입니다. 주님, 저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본당에서 장례 미사를 드리고 고인과 장례 행렬이 성당 문을 빠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바치는 저의 기도입니다.

장례 때마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는 생각할 것 없이

한 사람의 영혼을 주님께 보내는 순간은 그가 살아온 일생이 그저 장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해서 ‘잘 살았다’ 또는 ‘못 살았다’ 할 때,

주님 앞에서 그 차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판단과 평가일 따름이지요.

주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자녀가 비록 이승에서 못난 삶을 살고 돌아왔다고 해서

주님께서 당신 자녀에게 분노하시고 섭섭해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 눈에는 그가 살아왔던 그 모든 이야기가, 설령 우리 눈에는 온통 죄스러운 삶일지라도,

주님께서는 한계와 약함을 가지고 최선을 살았던 그의 장한 모습만을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도, 우리 자신도, 주님의 마음이 되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투성이처럼 보이는 사람도

그가 가진 약함과 한계를 가지고 그 나름대로 인생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죄스럽고 못난 모습도 있는 그대로 주님께서는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모든 경험을 다 하신 분이시기에

누구보다 우리의 약함과 한계를 잘 아십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

빛 속에서 사는 삶이 됩니다.

곧 우리 인생의 멍에는 가벼워집니다.

온전한 사랑

자신의 모습 가운데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요?

좀더 잘 살아 보고 싶고 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늘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사실 아무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빈틈없고 완전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고치기 어려운 결점을 안고 삽니다.

부부의 경우 누구보다 가깝기에 배우자의 결점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우자가 제발 이것만 고쳤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것이

한둘은 꼭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싸움을 해도 끝까지 고치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안고 사는 한두 가지 결점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양' 의 비유나 '잃어버린 은전 한 닢'

에 대한 비유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내면의 문제에 고나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잃어버렸다' 는 것은 내면의 '불완전함'의 이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안고 사는 내면의 결핍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라고 하신 것처럼 더욱더 완전한 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 나를 찾을 수 있는지요?

그것은 결점을 고치고 결핍을 채워서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사랑할 때는 상대방의 약점까지도 아름답게 보다가도

미운 마음이 들 때는 그 약점 때문에 상대방이 온통 새까맣게 보이는 경우와

똑 같습니다. 상대방의 약점도 사랑하는 연습으로 고쳐집니다.

사실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고쳐지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완전한 숫자인 100을 이루고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인생 여정도 바로 온전한 사랑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자신도 상대방도 완전해 집니다.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우리 인생의 올바른 판결

나이 30대의 어느 여성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에 직업도 안정되었으며

다른 외적조건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이제 딱 한 가지 멋진남자를 만나서 혼인만 하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의 매일 기도 주제는 좋은 남자를 만나 혼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도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한 채 그녀의 나이는 어느새 마흔이 되어

버렸습니다.그 여성은 지쳤고 절망햇습니다.

친구들도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인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자

삶은 더욱 외로워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겼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였지요.

"내생각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이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이사55,8-9)

하느님의 뜻은 우리 뜻과 다를 때가 매우 많습니다.

하늘과 땅의 높이와 깊이만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뜻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감추시고 맙니다.



만일 마흔에 이른 그 여성이 그토록 바라던 혼인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것으로 여기고 슬프게만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하느님마저도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녀의 인생은 늘 공허하고 외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느님께서 더 큰 무엇을 주시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운명을 주신다고 넓게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그에게 끊임없이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과부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판결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깃든 하느님

뜻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올바른 판결은 깊고 높은 하느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사랑하니까> -용혜원-

<사랑하니까> -용혜원-





사랑이란



함께 걷는 것이다.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같이 걷는 것이다.



서로의 높이를 같이하고



마음의 넓이를 같이하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까지



둘이 닮아가는 것이다.

위기는 선물이다. <성령 칠은-경외>-안젤름 그륀 신부-

Ⅲ) 위기는 선물이다. - <성령 七恩>

⑦ 일곱가지 선물 중에서 경외의 선물

성경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초라고 말한다.(시편111,19)

하느님은 나를 내적으로
압도하고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시다.

일출의 장엄한 아름다움이든 뇌우의 위협이든,
어떤 것에 대한 깊은 체험은 인간 영혼에 충격을 준다.
이런 체험은 그 자체로 두려움 또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사로잡힌다는 것,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하느님의 탁월성을 지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하느님께 삶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첨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모든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외는 위기를 상대화한다. 위기가 내 삶을 흔든다
해도 나는 위기를 하느님 뜻과 동등하게 여기거나 하느님께서
위기를 보내셨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의 형벌’과 같은
개념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위기를 통해 겪는 동요를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동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위기 가운데 있는
나를 어루만지신다.

위기를 겪을 때면 나는 충격을 받아 삶을 추스르지
못하고 계속하여 큰 동요를 느낀다. 이런 동요는 삶을
새롭게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기준을 설정하라고 경고한다.

“위기는 선물이다.”

겸손![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잘못한 것 같아요.

지금 기분이~~

어떻게 성당을 어떻게 갑자기 불릴 재간도 없고~~

제가 잘못한 건 없죠?

제의실로 들어가셔도 돼요.

할머니, 거기 거 불 때고 있다니까 제의실 넓은데......

난 추워서 안 올 줄 알았죠!

그냥 편안하게 계시지~~^^




지금 11월이면 무슨 성월이죠?

<위령성월>

아주 구두쇠 부자영감이 계셨데요.

아무튼 돈을 모으는 거, 그 목적으로 살았어요.

일가친척들한테도 아무리 그 사람들이 어려워도 정말 다른 사람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돈을 모았데요.

그래서 이제는 뭐 통장도 다섯 개 여섯 개가 되고/ 서울 강남에도 빌딩이 하나 있어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세만해도 한 달에 뭐 몇 천만 원씩이 되고/ 뭐 강릉 쪽에도 뭐 또 땅이 있고/ 아무튼 뭐 이래가지고 유일한 재미가 뭐겠어요. 통장 들여다보고 돈 불어나는 거 이게 재미였겠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주 배가 쥐어뜯을 듯이 아파.... 너무너무 아파요.

이분은 어디가 아프면 절대 병원에 안 갔거든요.

병원에 갈 돈이 어디 있어요? 아깝게....

그러니까 유일한 약이 뭐냐?

배꼽에다 아까징끼 바르는 거, 어지간하면 또 다 나았어.

웬만한 병은 그냥 빨간약만 배꼽에다가 쳐바르면은 그 희한하게 다 낫더라~~ 이거야.

그래 유일한 약은 빨간 약 하나밖에 없어.

그날 배가 하두 쥐어뜯어서 빨간약을 배꼽에다 발랐는데.... 한 병을 다 쏟아 부어도 뭐 여전히 나을 기세가 없네~~

뒹굴뒹굴 뒹굴 그러다가 큰아들을 불러가지고

“얘, 아이구 나 이러다 죽겠다. 병원에 좀 데려다 다오.”

“하이구 세상에 살다 살다 아버지가 병원엘 다 가신다고 그러고 참 해가 딴 데서 뜨겠습니다.”

그래서 병원엘 모시고 갔어요.

근데 뭐 이제 간 김에 종합검사를 했지요.

종합검사 결과가 나와서 병원에 큰아들과 갔더니 의사가 혀를 차.

“쯧쯧........”

그게 뭔 소리예요.

“아이구 참 영감님,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수? 뱃속이 다 암덩어리유. 뱃속이 다....”

그러면서 “영감님, 삼 개월 꼴까닥.....” 그러는 거예요.

그게 뭔 뜻이야.

“그러니까 가서 영감님 드시고 싶은 거 실컷 드시고 그냥 병원에 다시 오실필요가 없어요. 우리 의사들이 할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가세요.”

삼 개월 사형선고 받았어요.

참, 하늘이 노랗고 땅이 흔들리고 세상에 다른 건 안 아까운데 돈 못써보고 죽는다는 게 이게, 그 많은 돈을 다 어떡할거냐? 수백억이 되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넘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돈을 모았는데......이 어떡하냐 말이예요.

집에 갔더니 이제 가족회의가 열렸겠죠?

큰아들 작은 아들 며느리 해가지고 한방에 모여가지고 뭐 또 언성도 높아지고, 이 영감님이 화장실 가다가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얘길 하나~~’

하고 문에 다가 귀를 갔다댔더니 세상에 기가 막혀!

지 애비 아직 안 죽었는데 뭔 싸움하고 있는 거예요?

경험들이 많으시구만 그렇게 어려운걸 다 알고.....^^

아직 아버지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살아있는데 세상에~~

며느리들은 며느리들끼리 싸우고 앉았는거야.

“형님은 그래도 뭐 돈이 있잖아.”

며느리가 또 분배를 해요.

“저기 저 둘째는 서초동 꺼 니꺼야. 응, 그리고 막내는 강원도 평창에있는 그거 갖고, 그래도 우리가 내가 장손이니까 강남에 있는 빌딩은 내가 맡아야 되겠다.”

그러니까 또 그거가지고 작은 아들이 대들고 싸우고, 그 하는 꼬라지들을 보고 이 영감님이 팔십이 다 돼서 죽기 삼개월전에 이제야 철이 난거예요.

‘아~헛되고 헛되구나. 결국에 자식새끼들끼리 멱살 잡고 싸우게 내가 돈을 모았구나.’

그래서 죽음을 준비했어요.

그래서 자식들을 다 불러놓고 마지막 유언을 했습니다.

“너희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내 재산, 삶아먹든 튀겨먹든 꼬치를 해먹든 샤브샤브를 해먹든 마음대로 해먹어라. 근데 한 가지 내 원이 있다. 이거만큼은 꼬옥 들어줘야 된다.”

“뭡니까? 아버지”

재산 주신다는 데 뭐 다른 거 못해드리겠습니까?

“나 죽고 나면은 관을, 내가 들어갈 관을 특수제작을 해다오. 양 옆에다가 구멍을 내 가지고 양손을 관 밖으로 빼내라. 그리고 병풍을 치지 말고 관을 반드시 벽에다 세워놓고 양손이 빠져나오게끔 보여야된다.”

“아이구 아버지, 이제 어떻게 암이 뇌까지 올라가셨습니까? 뭔 소리세요?”
“이놈들아! 내가 지금 노망이 난 게 아니야. 아무튼 내 손을 빼놔. 손 쥐고 죽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뽄드를 발라서라도 손바닥을 펴놔. 분명히 내 친한 친구놈들, 나보다도 더 지독스럽게 사는 놈들이 몇 있는데 고 놈들이 내가 죽었다고 하면은 돈 만원씩 들고 부조를 해올 거다. 내가 내 마지막으로 내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하나, 바로 빈 손바닥이야. 내 그거 가르쳐 주고 싶어. 니놈들만큼은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내가 이렇게 넘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살아 돈을 긁어모았지만 빈손바닥보고 니놈들도 정신 차려. 이게 바로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내 친구들에게.....그러니까 니들은 아무튼 관을 특수제작을 해라.”

아버지가 삼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자식들은 아버지 원하는 대로 관 양쪽에 구멍을 뚫어서 팔을 양쪽으로 빼냈어요.

병풍을 치지 않고 관을 벽에다 세워놨죠.

세상에 사람들이 문상을 왔다가 다 뒤로 자빠지는 거야.

얼마나 놀랍고 무서워요?

시체손이 양쪽으로 빠져나와있으니.....

그러니까 그냥 오는 사람마다 “이 개 후레 잡놈들, 아버지 시신을 말이야. 저렇게 한다고 이놈들 어딨냐고?

노인네들이 막 자식을 두들겨 패려고 난리예요.

그거 한 마디 한 마디 대꾸하기가 귀찮으니깐 아예 프린트해가지고 코팅해서 벽에다 써 붙였어.

[아래와 같은 이유로 아버지 손이 빠져나와있음. 저희들은 아무잘못 없음.]

그거 먼저 읽어보고 들어오라고 앞에서 아예 안내까지 하나 해놓고.....

그 영감님의 친구들, 구두쇠영감 셋이서 그날 그 친구의 빈손바닥을 봤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에 포장마차에 앉아가지고 쏘주 한잔을 까면서....서로가 한마디씩 고개를 푹 숙이고.......

“야~ 너 뭐 느낀 거 없냐?”

“많다.”

“너는 느낀 거 없냐?

“야, 나 오늘 충격 받았어. 그놈이 그렇게 우리들 보라고 그렇게 손바닥 피고 죽은 거지? 맞지? 야, 나 오늘 정말 내 인생이 다 뒤집혀졌다. 걔 빈손바닥 보고....그래 이제 남은 여생, 비록 돈 모으기는 개처럼 내가 모았어도 이 돈 쓰는 거 만큼은 내가 정말 아름답게 쓰고 죽어야 되겠다. 그런데 아름답게 살려면 아름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종교가 있어야 돼 근데 내가 여기저기 알아보니깐 그래도 그중 천주교가 제일 낫다 그러더라. 그러니까 우리 성당 나가자.”

아, 이래가지고 한사람은 대치동 예비자 교리 반에 들어가고, 한사람은 역삼동으로 들어가고, 한사람은 뭐 또 거시기, 영등포쪽으로 가가지고 그래서 육 개월 후에 셋이서 베드로 바오로 루가 요렇게 세례 받았다~~

고 하는 전설이올시다. ^^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을 때 빈손으로 가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을 뜰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온몸에 휘감고 감을 믿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을 때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가지만

믿는 우리들은 성령의 칼을 쥐고 감을 믿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 뜨면서 아무런 준비를 못하고 가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용서와 화해를 하고 감을 믿습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같이 놀았데요.

하루 종일 놀고 이제 메뚜기가 가면서

“하루살이야! 우리 내일보자!”

그러니까 메뚜기가 아니 하루살이가 뭐라 그랬겠어요?

“내일이 뭐냐?”

하루살이한테는 내일이 없지요?
메뚜기랑 개구리가 친구가 돼서 일 년 내내 같이 놀다가 개구리가 이제 추우니까

“아이구 나 긴 잠자러 들어가야 되겠어. 우리 내년에 보자.”

그러니까 메뚜기가 “내년이 뭐냐?” 그랬데요.

또 개구리랑 철수랑 친구가 돼가지고 잘 놀다가 철수도 인제 나이가 들어가지고 ‘우리 비록 지금은 내가 헤어지지만 병이 들어서 나중에 우리 천국에서 보자.’

그러니까 개구리가 “천국이 뭐냐?” 그랬데요.




영생이 뭐냐!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분명히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 오신 거죠?

이 얼마나 불편해요?

여러분들, 돈 주고 있으라 해도 이렇게 쭈그리고 있겠어요?

참 이 좁은데..다리도 못 펴고, 이 얼마나 불편한 자세예요!

왜 신앙생활을 힘들게 할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못 갖고 살고...

또 나 같으면 장가도 못가고~~

수녀들 같으면 시집도 못 가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못하고 하느님 법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고 사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되는가!

그건 뭡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죠?

맞지요?

영생이 없다고 하면 나나 여러분이나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어요.

세상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지 뭐가 있냐...... 그럽니다.

심지어는 교인들도 그런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죽고 난 뒤에..뭐 가봐야 알지 뭐 있어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확률이 50%일거예요.

있다고 생각하면 못된 짓을 못해요~~

두렵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해!

그렇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믿고 살았어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는 불안해지기 시작해~~

내가 이제까지 믿었던 대로 죽고 난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면 아, 다행인데...

그런데 확률로 50%란 말이야

있든지.....없든지.....

그런데 내가 믿고 싶지 않은 내세가 만일 있다면...

내가 살아온 꼬라지로 봐서는 지옥밖에 갈 데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지요!




사제는 직업상 많은 죽음을 봅니다.

저 같으면 교우들 임종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신자아닌 사람들의 임종에 임할 때도 있어요.

어떤 때 가면 한평생 높은 직책만 찾아다니던 분인데.. 내 수단 자락을 잡고 막 살려달라고 난리를 쳐요...나 죽기 싫대요...신부님이니까 얘기해 줄 수 있지 않네...나 더 살고 싶대요.

그런데 그 영감님 연세가 89살이야, 그런데도 살려달라고 난리를 쳐요.

죽고 난 다음에 얼굴을 보면 편치가 않아....이쁘지가 않아요.

사람은 죽기 전에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이 다 총정리가 되요.

이 사람이 살아온 모습을 내가 보지 않았어도...

‘아, 참 추잡스럽게 죽는구나! 참 왜 이렇게 죽을까! 왜 이렇게 죽을까!’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만큼 두려운거지요.




비록 한평생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배추장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던 그런 할머니라 해도 믿음을 갖고 뜨거운 신앙 속에서 산 사람들은 임종 때 보면 위대하게 죽어요.

자식들 그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예요.

엄마, 엄마...하면서.... 할머니는 자식들한테 할 이야기 다 하세요!

“너 둘째 왜 우냐, 너 내가 죽는 것 계기로 너 성당 나가! 냉담 풀고 응?

그리고 첫째 , 너 언제 조당 풀거야! 조당 풀어.”




사제가 가면 어느 할머니들은 숨이 넘어가다가도 이렇게 깨요.

그러면서 지금처럼 할 얘기 다 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자성체까지 다 받아 잡숫고

“신부님 가!”

그렇게 아주 작별인사까지 할 것 다 하고 가셔요.

그런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천사얼굴이야.

‘얼마나 아름답고 이쁜 지 몰라!

그래서 사람은 죽기 전 죽고 난 다음에 얼굴을 보면.....

그리고 언제 또 알아요?

장례 치를 때 보면 알지요?

인심 잃고 산 사람은 장례 때 사람이 없어요.

며칠 전 우리 이모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장례 미사 때 제가 못 가서 전날 가서 미사를 드렸는데

우리 이모는 내가 봐도 참 천사였어요!

우리 녹번동신부님이 장례미사를 해 주시는데 그런 얘기를 하셨대요.

내 사제생활 오래 했어도 이렇게 천사같이 산 자매는 처음 봅니다.

100% 순명하고, 봉사하라면 봉사하고....정말 나눌 줄 알고...

우리 이모는 그렇게 사셨거든요.

장례미사 때 성당이 꽉 찼대요. 새카만 옷을 입고....

평소에 인심을 잃고 하느님과 사람 앞에 막 되게 산 사람은 죽고 난 다음에 보면 3일 동안 썰렁해요. 사람이 안 가요.

사람이 죽고 난 뒤에....죽고 난 다음에 얼굴, 장례 치를 때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총정리가 되지요.




위령성월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해 같이 기도하는 성월이지요.

중심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월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분명히 심판을 받고 천당과 연옥, 지옥으로 가지요.

그런데 영혼을 위한 기도의 목표는 천당에 있는 사람입니까?

지옥에 있는 사람입니까?

연옥에 있는 사람입니까?

어느 쪽에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위령미사 드리고 연도 바치는 이유는, 천국이나 지옥에 있는 사람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지요?

천국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해요!

오히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위해 기도해 주지요.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아무리 기도하고 위령미사 드려도 못 올라와요.

우리들이 드리는 연도의 목표는 어디냐!

연옥영혼들이예요.

내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모르잖아요.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가 지금 연옥에 계신지, 천국에 계신지, 지옥에 계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기를 쓰고 조상들을 위해서 미사 봉헌하는 거예요.

개신교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없어요.

개신교는 도 아니면 모예요. 그렇죠?

천국 아니면, 지옥이예요.

그렇게 둘 밖에 없다고 그런다면 솔직히 천국 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서 개신교에는 위령성월이라는 게 없어요.

연도라는 게 없어요.




마태복음 5장 26절에 보면 연옥이야기가 나오죠.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풀려나오지 못할 것이다.>

‘연옥에서 보속을 다해야만 나온다!’ 그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영혼은 연옥을 얘기하는 겁니다.




집회서 7장 33절에 보면

<산 사람 모두에게 너그럽게 은덕을 베풀 것이며, 죽은 사람에게까지도 은덕을 베풀어 주실 겁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말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도 연옥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당당하게 천당 갈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점수로 따져서 90점 이상만 천국가고 90점 이하는 지옥 간다.

그럼 90점 이상 받을 사람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되겠는가!




하느님은 그렇게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천국 가기에는 쪼끔 때가 묻어 있고, 지옥에 가기에는 빨아서 쓰면 좀 쓸만 하고.....

그러니까 연옥에 가서 탁 세탁해서 깨끗하게 된 다음에 천국으로 보내는 거지요. 그게 바로 연옥이예요.

개신교에는 연옥이 없어요.

연옥이 있는 영혼들에게 지상에 있는 이들이 바치는 기도와 위령미사는 천국 가는 노자 돈이 됩니다.




내가 바치는 기도와 위령미사만 있다면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가 거기에 있다면 연옥에 계신 내 부모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조상들에게 내려오는 어둠의 영향이 후손들에게 내려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후손들에게 연도를 받아야 할 처지임을 생각하면서 연옥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 산 사람은 죽을 때 모습이 아름답고 그 내세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언제라도 그분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될 겁니다.

특히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정리하십시오.




그래서 11월 한 달, 우리의 영적 테마는 겸손입니다.

위령성월은 겸손을 깨우쳐 줍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 숙이고 다닌다고 겸손은 아닐 겁니다.

겸손은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겸손은 자기에 대한 끝없는 관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끝없이 뒤돌아보면서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고백할 때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 겸손이지....고개 숙이고 다닌다고 겸손은 아닐 겁니다.

이 겸손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저절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에 대한 관상도 소홀히 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먼저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늘 삐거덕거립니다.

다시 말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녁기도 하나만이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충실히 한다면.... 그 사람은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공의회 이후에 세상을 향해서 많이 열려져 있었지만

잃어버린 것도 참 많이 있습니다.

아마 그 중에 대표가 신공이 아니겠는가!

원래 우리 가톨릭교회는 기도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신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공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기도가 조과(朝課)

잠자기 전에 하는 기도가 만과(晩課)

그 과자는 일 課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못 먹고 학교에 가는 한이 있어도 조과를 드려야 되고/ 밤에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파김치가 되어도 만과를 바쳐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신앙선배들이었습니다




우리 가톨릭에는 신공이 없어져서 이렇게 냉담자가 많은 것이 아닌가!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초등학교까지는 엄마 무서워서 성당에 나오지만......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냉담에 빠집니다.

11월 한 달 동안 먼저 가신 연령들과 더불어서 내 영혼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거룩한 성월이 되도록 살펴보는 한 달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최후심판의 잣대

2011.11.11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336-397) 축일

이사61,1-3ㄱ 마태25,31-40





최후심판의 잣대



누구나 직면해야 하는 최후심판입니다.

최후 심판의 잣대는 자비행입니다.

가을 열매들로 평가 받는 과일 나무들처럼

우리 역시 최후심판대에서는 사랑의 열매들로 평가 받을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들 잘 열려 익어갈 때 ‘충만한 삶’이요,

사랑의 열매들 빈약할 때 어김없이 따라오는 ‘공허한 삶’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6개 항목의

구체적 최후심판의 잣대를 통과한 의인을 통해

우리의 자비행을 비춰보게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

이어 주님의 말씀에 의아해 하는 의인에 대한 주님의 자상한 해명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주님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내 형제라 하며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시고

자신의 삶의 지침으로 삼아

평생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한 자비 행에 전력을 다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이 말씀을 받으셨고

평생 이 말씀대로 자비행을 실천하신 결과가 오늘의 최후심판의 복음입니다.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구체적으로 곤궁 중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의 실천으로 도우라는

간곡한 명령입니다.



최후심판의 복음을

참으로 엄중하게 받아들인 수도교부들이요 분도 성인이었습니다.



우리 분도수도승의 환대 영성의 근거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 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RB53,1).



사랑은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성체 안에만 현존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곤궁 한 이들 안에도 똑같이 주님은 현존하십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곤궁 중에 있는 이들 역시

주님의 살아있는 성체입니다.

미사 중, 성체를 사랑으로 받아 모시듯,

곤궁 중에 있는 이들 역시 사랑으로 따뜻이 돌보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미사의 완성이요 전례와 삶의 일치입니다.



성 마르티노의 회심 역시

가난한 걸인을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감동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그는 문밖에서 떨고 있는 걸인을 보자

즉시 그의 외투를 둘로 찢어 반쪽을 그 걸인에게 주었다.

그날 밤 그는 꿈 중에 반쪽 외투를 입은 그리스도를 보았고 말씀을 들었다.

“마르티노야 네가 나에게 네 망토를 입혀주었구나.”

그는 즉시 세례를 받고 로마 군대를 떠나

그리스도의 군인(a soldier of Christ)이 되었다.-

성 빠코미오,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역시 성 마르티노 처럼

‘세상의 군인’에서 ‘그리스도의 군인’으로 회심한 성인들입니다.



우리 수도승들 역시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온전히 투신하라 불림 받는

그리스도의 군인들입니다.

온 인류가 주님의 심판대 설 것입니다.

주님의 최후심판 잣대는 종교도 종파도, 예배도 기도도 아닌 자비행입니다.

모든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인 자비와 사랑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가난한 우리를 찾아 주셔서

위로와 평화를 주시고 이웃과 그 사랑을 나누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믿음만 있으면 다 되는 겁니까? -안젤름 그륀 신부-

<믿음만 있으면 다 되는 겁니까?>

우리가 살면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바라고 굳게 믿는 것뿐이라고
어떤 친구는 말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가요?

어떻게 하면,
제 인생이 긍정적으로 바뀌도록
소망에 대한 의지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너는 그저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지요.

실제로
내가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자마자 그것이 내 수중에 굴러
들어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될 것이고,
신이 우리에게 성공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는 다면
분명 일정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믿는 것을 자동으로 불러내는 마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 속에서 나 자신을 신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내가 믿는 것은 신이 어린애 같은 내 소망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무언가를 내게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인생, 어찌하면 좋을까요?
안젤름 그륀 신부.
2011.11.12 토요일 성 요사팟 주교(1580-1623) 순교자 기념일

지혜18,14-16;19,6-9 루카18,1-8





끊임없는 기도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생명이자 삶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끊어져선 안 됩니다.

좋든 싫든 기도해야 삽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환경에 개의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래서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이자 하느님과의 싸움입니다.

이런 기도의 싸움은 죽어야 끝납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가 기도의 모범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무반응에 포기하고 싶은 내적 유혹도 많았을 것이나

과부는 결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여

불의한 재판관의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바로 자기와의 싸움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싸움에 승리한 기도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가 순수해야 항구할 수 있고 응답도 받습니다.

‘올바른 판결’이 뜻하는바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과부가 제 뜻대로가 아닌 올바른 판결을 위해 간청했듯이,

하느님의 뜻대로 항구히 기도할 때 응답을 받습니다.





매일 미사 묵상 부분의 다음 내용이 참 적절하여 인용합니다.

“과부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판결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깃든 하느님 뜻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올바른 판결은 깊고 높은 하느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참 깊고 아름다운 묵상입니다.

하느님 안에 올바른 판결이 있고, 우리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항구히 하느님의 뜻을 찾아 기도할 때

하느님 안에 내 삶의 의미가,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계시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기도의 은총으로 내적변화요 치유입니다.

마음이 새로우면 모두가 새로운 법입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내외적 환경도 순조롭게 펼쳐집니다.





가끔 듣는 고백입니다.

“외적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마음은 참 평화롭습니다.

예전처럼 힘들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게 기도의 은총입니다.

1독서 지혜서의 다음 말씀도

기도의 은총으로 평화롭게 변화된 내외적 상황을 상징합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이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주님 손길의 보호를 받으며 일상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하루를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거듭 우리에게 항구히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고 싶어도 우리가 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 올바른 판결을 위해 끊임없이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적절한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마지막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향한 화두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부단히 우리의 기도생활을, 믿음의 정도를 살펴보게 하는

주님의 죽비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시어 기도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축복 받는 신앙인의 십계명

†찬미예수님

한 달 동안 별 일 없었지요?

별 일 많으셨습니까?

오늘 보니까 80%는 주로 보던 분들이고, 20%는 처음 보는 분들이십니다.

한 해가 빨리 지나갑니까?

아니면 잘 안 지나갑니까?

한 해가 정말 빨리 지나갑니다.

아유, 나 이러다 환갑 며칠 안 남은 것 같아~~왜 이렇게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는지....




1월 초부터 가정방문을 다니고 있습니다.

3월부터는 순례자들이 워낙 많이 오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을 써야 되니까 본당신자들과 만날 시간은 겨울밖에 없어요.




제가 오고 이곳 체제가 좀 바뀌었어요.

본당 신부노릇도 해야 하고, 순례지 신부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본당신부 노릇 하기도 벅찬 데예요.

청주교구 母본당, 첫 번째 어머니본당이라 본당신부하기도 수월하거나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그런데 순례지 신부까지 해야 되니까~~

나중에 한 10년 후쯤이나 될까~~

그때는 순례지 전담신부, 본당신부 따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작년 10월에 주교님께서 이곳을 순례지로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순례지다!>

이렇게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순례지가 되는 것은 아니죠?

순례지에 걸맞게끔 여러 가지로 해야 될 것이 참 많아요.

여기 본당신자들이 보면 ‘아, 순례지로 선포도 되었고, 그렇게 숙원사업이던 화장실도 지었고, 주차장도 흙에서 이렇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순례지가 다 되었나보다!’

아니죠~~




이제 마스터플랜이 나왔어요!

마스터플랜 짜는 데만 3000만원이 들었습니다.

그 마스터플랜에 의해서 향후 이렇게 순례지가 된다!

순례자들이 와서 한 눈에 보고

‘이렇게 세워지겠구나!’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지요!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예처럼 외국에서도 순례 객이 오려면 여러 가지 작업이 필요하지요?

순례객 중에 불어권 사람이 올 수도 있고, 영어권 사람이 올 수도 있고....

그런데 지금 사무장이나 사무실 직원 보고 지금부터 일어, 불어학원 다니라고 할 수 없잖아요.

쏼라~~쏼라 대고 눈 노~오란 사람이 와서 뭐라고 하면 사무장 어떻게 할 거예요?

손짓, 발짓....순례자들 위해 그렇다고 바디랭귀지로 할 거예요?

영문 팜플렛, 영문으로 된 소책자 몇 십 페이지짜리도 있어야 하고…….

어느 건물 앞에 딱 서서 스위치만 누르면 영어, 일어, 불어…….로 나오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사무실에 일본사람이 찾아오면 이어폰을 꽂아주고 녹음기 눌러 주면 좌측에는 무엇이고…….우측은 무엇이고…… 이런 시스템 같은 것……

하여튼 할 일이 많아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왜 내 눈에만 그런 게 보이는 걸까!

인생이 고달 퍼요!

다른 신부들은 한평생 살아도 그게 안 보이는데…….

나는 이게 병이야~~

어느 성당 가던지 보여!

이게 들어서야 하고...이게 병이야!




그래서 겨울을 이용해서 신자들을 만나 사목을 합니다.

제가 오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여주에 있는 부엉 골을 찾아갔습니다.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 1894년 처음 사목을 하시던 곳인데 여주에서 문막으로 넘어가는 곳, 거기 어디 있다는 소리만 듣고 찾아갔는데 몇 시간을 헤매다 못 찾고 그냥 돌아왔어요.

나중에 노인 한 분을 모시고 가서 다시 찾아보아야겠어요.

거기 가면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 말을 타실 때 말이 키가 크니까 딛고 올라서던 바위가 있대요!

그런데 내가 딴 곳을 찾아 헤맸는지 못 찾았어요!




내가 와서 복숭아밭을 하나 샀지요.

빚이 30억이지만 그래도 저 복숭아밭은 사 놓아야겠다!

왜? 나중에 주차장으로 써야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 문제가 심각해진 거예요.

기도와 찬미의 밤에는 이 마을이 온통 교통이 마비되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복숭아나무를 없애고 지금 주차장을 만들고 있어요.

내가 저 땅을 살 때만 해도 평당 15만원이었어요.

지금은 60만원이 넘어요....지금 사려고 하면 사지도 못해요.

그때도 빚이 수십억 있었지만, 저걸 사 놓아야만 지금 현재 주차장 자리와

붙어 있어서 아무리 차가 많이 와도 다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일이 많죠!




제가 온지 일 년 반 만에 우리 신자들 처음으로 가정방문을 다니는데 450세대를

돌아야 합니다.

하루에 한 30집을...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저녁에 구역미사로 끝납니다.

힘은 들지요!

그래서 감기가 낫지 않습니다.




반장, 구역장과 같이 방문하면 먼저 가정을 위한 기도문 같이 바치고

집안 구석구석 성수를 뿌리면서 구마기도를 해 드립니다.

<이 집에 혹 우리 신자들에게 어둠의 세력이 있다면 나자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마귀야 나가라!>

가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으면 손을 대고 영과 육의 치유가 되기를 간절히 빌면서

안수기도를 해 줍니다.

그리고 교적을 보면서 이 집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살펴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인구대비 신자가 제일 많은 곳은 이곳 감곡성당입니다.

또 한국에서 냉담률이 가장 높은 곳 역시 감곡성당입니다.

왜 그러냐?

가정방문을 다녀보면 교적이 꽉 차 있어요.

맨 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 있고.... 자식들은 다 냉담입니다.

“이 교적 왜 안 떼어 보내냐?”

“아, 떼어 보내면 뭐 합니까? 다 냉담하고 있는데....”

실제로 교적 상 2800명인데 이 감곡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보면 1000명이

채 안돼요.

감곡에서 구역미사를 하며 그 이야기를 해요.

“참 교적을 보면 힘이 쪽쪽 빠집니다....왜 자식들 냉담하게 두느냐? "

“하나같이 중학교 때부터 객지에 나가있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좋다! 냉담자가 된 것 까지는 이해를 하는데... 그 냉담자녀를 위해 피눈물

나게 기도해 본 적 있냐?”

대답 못하지요!

“냉담 하면 안 된다!”

명절 때 오면 의무감 때문에 툭툭 던지지만 그건 기도가 아니지요?

기도는 뭐냐!

십자가 밑에다 냉담 하는 자식들 이름 써 붙여 놓고

“주님, 내 아들 좀 살려주십시오!”

“성모님, 내 딸 좀 성당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

나중에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 부르실 거예요.

“어떻게 니 자식들은 하나같이 다 냉담자만 있냐!”

“아, 어떻게 객지로 떠돌아다니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 그건 내가 인정한다! 그 자식들 성당에 나오게끔 얼마나 나한테 기도했냐?”


이런 프로테이지는 여기만이 아니라 한국 전체 냉담자수가 50%가 넘고 있어요.

교적 대비 주일미사 참례자가 30%밖에 안돼요.

교적에 1000명이 있으면 300명밖에 안 된다...그 뜻입니다.




냉담자 회두를 생각으로만 하면 안 돼요!

정말로 기도와 희생이 필요해요!

눈물을 흘리면서 한 영혼을 끌어내야 돼요!

다 큰 사람, 성당 나가라!

말재주 가지고 안 돼요!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냉담자들이 제 테이프를 듣거나 TV 강론을 듣고 성사를 봅니다.

어떤 분은 저 사람 도저히 안 되겠다!

들어보라고 갖다 주면.... 그 테이프 듣는데 1년 후에 들을 수도 있고, 2년 후에

들을 수도 있습니다.

들으면 회두를 한다! 이거지요.

교적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씩 줍니다.

그 선물이 뭐냐~~

<축복 받는 신앙인의 10계명>




이때 수녀님이 배부하는 거예요.

뒤로 돌려요~~양쪽으로~~ 한 집에 하나....

캐나다에서 온 베드로 형제는 가져가서 복사를 해서 전해주세요!

가정 방문 가서 이걸 꼭 걸어드려!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부터 읽고 시작해라!

이대로만 살면 축복받을 수밖에 없다!




이건 책에서 보고 베낀 것이 아니라, 제가 사제생활 24년 하면서

‘아, 우리 신자들이 이렇게만 살면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목 체험에서 우러나온 나온 십계명입니다.

같이 읽어 봅시다.




**축복 받는 신앙인의 10계명**



1)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라!

2) 열심히 성서를 봉독하라!

3) 주일미사에 참례하라!

4) 하느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라!

5) 열심히 전교하라!

6) 교우와 사귀고 신앙서적을 읽어라!

7) 열심히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8) 언행에 조심하고 모든 일에 절제하라!

9) 황금률을 실행하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 12>

10)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한 번 더 일 계명부터 십계명까지......

첫 번째가 기도입니다.

두 번째가 성서이고, 세 번째가 주일미사, 성체입니다.

네 번째가 봉헌입니다.

다섯 번째가 전교이고, 여섯 번째가 친교입니다.

일곱 번째가 봉사이고, 여덟 번째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윤리대로 사는 겁니다.

아홉 번째가 황금률입니다.

이걸 나눠 드리니까 노인 분들이 황금률이 뭐냐! 고 자꾸 되물어 보셨어요.

황금률이 뭐냐!

그 밑에 나오는 마태복음 7장 12절이 성서에 나오는 제일 황금이에요.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 마태 7, 12>

네가 남에게 뭘 원하면 먼저 그 사람에게 그거 해 줘라!

이거지요!

마지막으로 성령입니다.




기도로 시작하라고 그랬습니다.




제 강론 테이프에 아침에 눈이 떠지면 모든 잡생각과 잡소리가 내 귀를 지배하고 내 의식을 지배하기 전에 눈이 떠지면 제일 첫 번째 해야 되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몸에 자기가 축성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따라 오는 것이 뭐냐!

<주님,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삶의 연장에 대한 기도..왜냐?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하루 밤 사이에 죽는 사람이 500명이 넘는다고 그래요....

심장마비로 죽고...교통사고로 죽고..이런 저런 이유로....

그래서 밤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눈이 떠지는 그 자체가 기적 이예요!

샤터가 올라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주님,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늘 기도라는 이 말이 원래는 개신교 용어라고 했지요.

가톨릭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말이 없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신공(神功) - 거룩한 공로입니다.

아침에 하는 기도를 조과(朝課)

저녁에 하는 기도를 만과(晩課)

과는 일과 (課) 자 예요.




밥을 못 먹는 한이 있어도, 세수를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제일 먼저 해야 되는 일이 바로 아침기도입니다. (朝課)

밤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晩課입니다.

몸이 피곤하고 몸살, 감기가 와도....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반드시 잠자기 전에 저녁기도를 바쳐야 돼요!

왜 그렇게 냉담 자가 많고, 자식, 새끼들 가운데 냉담자가 많은 이유는 우리 가톨릭에서 이 신공이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 부모들 애들 데리고 저녁기도 안 해요!

기도가 없어진 그 가정은 냉담자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우리 집은 구교우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제가 둘이 나왔잖아요!

그 힘이 뭐냐?

우리 부모님이 가르쳐 준 그 신공이에요!




아침에 일어나 밥 못 먹고 학교 간 적 많았어요.

아침기도 안 하면 절대 밥 안 먹여요.

우리 부모님들은 밥 먹는 시간에 기도 바쳐요!

그러니 기도하다가 보면 밥 먹을 시간이 없지요!

아주 그때 내가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몰라~~

‘이담에 크면 절대 조과 안 할 거다!’

밤에 잠을 맘대로 잘 수가 있어요?

형제 다섯 쪼르르 앉혀 놓고, 아버지 어머니는 뒤에 딱 지키고 앉아 가지고~~

지금 가톨릭 기도서 저녁기도는 그거 5분도 안 걸려요!

옛날 저녁 만과는 기본이 한 시간이야~~

묵주기도 15단은 반드시 해야 되는 거고~~

복자 열품도문, 그때는 성인이 없던 시대였으니까~~

복자열품도문 외어야 되지요~~

교황님을 위한 기도 전부 읽어야 돼요!

그럼 한 시간 반이야~~

그러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게 했어요!

꾸벅꾸벅 졸면 뒤에서 불똥이 튀지요~~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내가 지금은 힘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대항을 못하지만 나중에 크기만 해라..절대 지겨운 저녁기도 안 하고 바로 잘 거다!’

그렇게 신공이 하기 싫었는데, 지금 내 사제 생활을 잡아 주고 있는 것이 부모님한테 배운 그 신공이예요.

아무리 피곤하고, 피정을 하고 2~3시에 들어가도...그냥 술 한 잔 먹고 취해서~~ 몸둥아리는 그냥 침대로 가라고 그래도~~침대에 가기 전에 성무일도 펴서 마지막 기도 바치고, 오늘 묵주기도 못한 것, 마지막 몇 단 남았나~~

꾸벅꾸벅~~

왔다갔다~~ 하더라도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게 어릴 때 배운 습관이에요.




어떨 때 아침에 일어나보면 기도하다가 침대에도 못 갔어요.

성무일도 끌어안고 그냥 새우잠 자고 있었어요.

이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부모가 기도하지 않으면 자식이 절대 기도하지 않아요.




어제 강론 빨리 떴지요?

거기 내가 뭐라고 했어요!

우리가 신자로 살면서 절대 버려서 안 될 것 있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다.




신앙인이 절대 버려서는 안 될 것, 첫 번째가 신앙, 두 번째가 기도, 세 번째가 희망 네 번째가 천국을 향하는 마음 다섯 번째가 가족이라고 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버려야 할 것 첫 번째가 미움이라고 그랬어요.

두 번째가 집착, 세 번째가 분노라고 그랬어요.

미움과 분노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고 그랬지요?

미움은 늘 물 흐르듯이 내 삶에 항상 깔려 있는 어둠!

그런데 분노는 깔깔깔~~ 웃다가도 뭐 한번 내지르듯이 화를 내는 것....

악습이지요!

또 반드시 버려야 할 것, 상처지요....가계상처!




절대 버려서는 안 될 것...그거 버리면 시체와 같은 것..

기도입니다!

사제도 기도 안 하면 안 되지요.




두 번째는 성서

그거 얘기 하나 마나지요.

저는 카페가족들이 제 축복장 좀 많이 받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카페가족들 중에 손에 성서필사반지 끼고 있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하나, 둘, 셋....음 여섯 정도....




우리 카페가족이 1600명이 넘어섰지요!

작은 카페가 아닙니다.

우리 카페가족들이 성서를 많이 썼으면 좋겠어요.

우리 베드로형제, 캐나다에서 오셨지만, 우리 교포들도 성서 써 가지고 많이 와요.

다 들고 오지 말라고 그럽니다.

창세기와 요한 묵시록, 두 권만 들고 오라고 그래요.

또 어떤 분은 컴퓨터로 쳤는데, 프린트를 해서....몇 년 전까지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쳐서 가져 오되 디스켓만 가져오지 말고 그걸 제본해서 가지고 오라고 그럽니다.




4계명이 뭐라고 나왔습니까?

봉헌이죠!




어제 강론 가운데 감나무 얘기 들으셨어요?

엿장수 얘기도 했고, 교무금나무 얘기도 했지요.

어느 농부가 앞뜰에 있는 감나무는 많이 열리지 않는데 교무금 나무로 정해 놓고 뒤에 많이 열리는 나무는 자식들 학비 대는 감나무로 정해 놓았는데 그 교무금나무에서 나오는 나무로 교무금을 내는데 어느 해 가뭄이 들어서 풀과 나무가 다 말라죽었지만 유독 교무금 감나무만큼은 다른 해보다 몇 배나 감이 더 열려서 오히려 그 감을 팔아서 자식까지 먹여 살릴 수 있었지요!

그런 것을 체험한 농부는 후회했다 아닙니까!

진작 뒤뜰에 많이 열리는 감나무를 교무금나무로 하느님께 드릴걸....

다시 말하면 이렇게 제일 좋은 것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을 살려줄 수 있다면 정말 좋은 것을 드릴 때는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겠는가!

그걸 나중에야 후회하는 거예요.




이 감곡신자들 거의 80%가 복숭아농사를 지어요.

집집마다 다녀보면 수백그루씩....

이 감곡은 동네가 다 복숭아밭이야~~

집집마다 요만큼은 하느님 것이야~~

여기서 나오는 것은 100% 하느님께 드릴거야!!

복숭아농사를 이렇게 많이 짓는데 교무금복숭아나무가 과연 몇 그루나 되느냐~~

여기 신자들한테 내가 그랬어~~

그런 강론 들었으니까 교무금복숭아나무도 나오겠지~~




8계명을 보면 언행에 조심하고 모든 일에 절제하라!

우리 신자들 고백성사 보는 내용 중에 80%가 말입니다.

말......혀를 다스리는 자가 자기 영혼을 다스린다!

혀는 사람 몸 중에 아주 작은 것이지만 천국을 결정하느냐!

지옥을 결정하느냐!

이 혓바닥에 달려 있습니다.

조심..조심....거듭..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9계명, 황금률을 실행하라!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여러분들, 남에게서 받을 때가 행복합디까?

남을 위해 할 때가 행복합디까?

받는 것도 기분 좋지만 대개는 남을 위해 봉사하고 남을 위해

희생할 때가 더 행복해요!

그렇지요?

여러분들, 받을 때 더 좋으세요?

아니면 베풀 때가 더 좋으세요?

받을 때가 더 좋지요?

그게 황금률이에요!




가정방문 다니면서 제가 선물로 하나씩 드렸듯이 카페가족들에게도

선물로 드립니다.

그걸 프린트해서 여러분 가족들, 단원들한테 나누어 주세요!

조금 더 정성을 드린다면 이렇게 코팅을 해서 나누어 주시면 좋아하겠지요?

이렇게 만드는 거 어렵지 않아요!

이게 병이야~~

내가 너무 친절한 거~~^^




축복받는 신앙인의 십계명, 십자가 밑에 걸어 두세요!

십자가 밑에 걸어두고 아침에 일어나서 부인과 같이 그 앞에 서서

성호 긋고 한 번 읽으세요.

우리는 묘하게도 사랑하는 것을 쳐다보면 닮아가죠? 그죠?

예수님 십자고상을 자꾸 쳐다보면 예수님처럼 닮아가요!

방마다 거실마다 십자가가 걸려 있어도 우리들 한 번도 안 보고 지나갈 때도 많아요. 그렇죠?

들어갔다 나갔다... 그럴 뿐이지~~

예수님 얼마나 힘 드시겠어~~

하루 종일 365일 매달려 계시는데

어이구, 딸년이라는 게 들락거리기나 하지~~

예수님께서 눈 한번 맞추어 보시려고 “얘야~~ 얘야~~” 하시지만

어디 쳐다보기나 하나~~ 신발은 '홱~~ ' 뒤로 날려버리고~~

성모님도 그 밑에서 ‘어이구, 딸 들어오네~~’

눈길조차 주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는 우리가 많이 쳐다보는 것을 닮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많이 쳐다보면 예수님을 닮게 되어 있어요!

십계명을 보면서 이것을 계속 읽다 보면 이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축복 받는 신앙인의 십계명, 이것을 지키려면

열 번째,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함을 명심합시다! 아멘

마지막 강의

얼마 전에 읽었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 카네기 벨런 대학의 랜디포시 교수는 47세의 나이로 컴퓨터 공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췌장암 말기로 몇 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지요.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교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바싹 마른 얼굴로 마지막 강의를 진행합니다. 이것이 미국 전체에 인터넷으로 전해지면서 500만 명의 국민들을 울렸고, 그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어 저 역시 읽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강의에서 이렇게 강조하여 말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인생의 벽이 있는데 이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 지를 시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당신이 뭔가 망쳤다면 사과하세요.”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주세요.”

“행운은 준비된 자가 기회를 만날 때 오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말씀들이 지금 우리의 가슴 속을 마구 흔드는 것 같네요. 지금 내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나에게 부족한 것들을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실천하세요.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연중 제33주일 - 환난의 시대

†찬미예수님

날이 많이 춥습니다. 그렇죠?

지금 여러분들 미사시간 맞춰서 오느라고 바쁘셨지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식구들 밥 해줘야 되고....

또 우리 자매들은 뭐 또 화장품 몇 개 찍어 발라야 되고..

복잡합니다. 한 번 떠나려면.....잘오셨습니다.

우리 본당 신자들도 잘 계셨죠?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우리본당 신자들 보는 맛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죠? 네, 대답이 시원치 않네요....^^



뭐를 조사하는 데를 ‘리써치’ 그런 조사기관이 많아요.

대선을 앞두고 이것저것 조사하지만....

그런 조사가 아니라 요즘사람들이 살면서 물론 차이가 있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이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뭡니까?

텔레비전에도 듣고 뉴스에서도 듣고......

“아이구, 말세야 말세”

그 말을 제일 많이 한데요.

자기도 모르게 “아이구, 말세야 말세! ”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세라고 표현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금이 세상 끝날!

다시 말하면 환난의 시대다!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




오늘 여러분들이 들은 복음은 분명히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내가 앞으로 올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는 것을 얘기해주셨어요.

그런데 2천년이 지나갔지만 아직 주님 재림이 안 왔어요.

뭐 이천년이 지나도 주님 재림이 안 오는데...

아직 우리시대는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정할 수가 없지요?

바오로 사도는 곧 주님의 재림이 올 것 같기 때문에 가능한 한

시집장가 가지 말고 독신으로 주님재림 맞이하자 그랬어요.

그랬는데 이천년 지났는데 아직 주님의 재림이 안 왔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하루하루 따지는

이 날과 주님의 날은 다르다는 거지요!

시편에 보면 <하느님의 눈에는 천년도 하루 같고 하루도 천년 같다.>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 지났지만 하느님 쪽에서 볼 때는 며칠?

이틀밖에 안 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시대에는 이런 세상종말이 절대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아무도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믿음을 주는 것이 전세계에서 교회가 인정한 성모님의 발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발현과 동시에 메시지를 주시는데 늘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환난의 시대다!>

이 시대가 지나면 주님 재림과 동시에 세상 종말이 오는데

그 중에 사탄은 어떡해서든지 귀중한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이니 복음말씀대로

늘 깨어서 준비하고 원수를 물리쳐라!

하고 얘기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 세상 끝날이 오기 전에 그 징표에 대한 것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 또 성모님이 얘기하신

환난의 시대라고 하는 징표를 여러 가지 얘기해주고 계십니다.




다섯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첫 번째가 지금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말세요!

우리들이 얘기하는 환난의 시대인 첫 번째 징표는 뭐냐?

교회가 어둠에 많이 물들어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오류가 침투해있다는 겁니다.

이 오류라고 하는 것은 교회 밖에서 들어오는 오류가 있고,

교회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겨난 오류가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신자들을 분별 못하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많은 소위 신영성이 있습니다.

유사종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뉴에이지, 또 기수련운동, 일본에서 들어온 정신세계 운동, 소위 이러한 사이비들.......

얼핏 보면 자연을 찬미하고 자기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단계가

깊어지면 반그리스도교적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로 되어버립니다.

여기에 빠지면 신자들은 본당단체에 가입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혼자 참선하는 거 찾고 있고, 잘나오던 레지오단원이 안나옵니다.

물어보면 기도장에 다니고 있고, 기에 빠져서 무슨 단계별로

깊이깊이 빠지고 있습니다.

정신세계운동에 빠지고, 한마음 운동에 빠지고, 계룡산 밑에 가서 주일미사 참석안하고....

그 수천명 모이는 신자가운데 천주교 신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지도자들은 분명히 원칙을 가르쳐야합니다.

자신의 사상을 개인적인 생각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쳐선 안 되고

우리 신자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딴 곳에 한눈을 팔지 않도록

듣기 싫어도 원칙을 가르쳐야 됩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얘기지만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자체가 가로질러가는 길이 없습니다.

우직하게 가야되는 겁니다.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피정을 할 때마다

특별한 것을 가르치고 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전통을 가르칩니다.

기초가 안 된 집은 작은 지진에도 무너지고 사탄의 유혹에도 속수무책입니다.

이렇게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수많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사상과 조류에

우리 신자들도 많이 휩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뭐냐?

교회지도자들이 영적분별이 부족하다보니까 아주 귀중하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뭐 예를 들면 지금 짓는 성당에 어디 가더라도 장궤틀이 없습니다.

수십억짜리 성당을 지으면서도 장궤틀을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장궤틀을 못 본 신자들은 우리 감곡성당에 오면

이 장궤틀을 보고 아주 신기해합니다. 장궤틀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여긴 친절하기도 해라. 발 시려울까봐 발틀까지도 준비해놨어.’

발을 덜렁 올려놓습니다. 그건 발틀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무릎 꿇으라고 하는 장궤틀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할 수 있는

첫 번째 경배행위입니다.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와서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 어디를 돌아다녀 봐도 무릎을 꿇고 싶어도

무릎 꿇을 성당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잘못된 분별로 우리 신자들을 하느님 앞에 무릎 못 꿇게 하는

우리 교회도 나중에 엄한 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또 여러 본당을 다녀보면 성당 안에 성모님 상이 없습니다.

그 큰 성당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성모님상이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 여기저기 찾아보면 나무 구덩이 속에 시커멓게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 성당밖에 버려진 모습입니다.




개신교는 엄마를 성모님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우리교회 안에서도, 천주교 안에서도, 자모이신 이 성교회 안에서도....

사제들이 분별이 없으면 성모님을 내쫓습니다.

어느 신부님은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다음 부가 전혀 그런 데에 관심이 없으면

‘이게 뭐야? 내쳐....'아~ 이러니까 자꾸 개신교한테 우상소리 듣지.’

하면서 밖으로 내버립니다.




오류가 교회 안에 침투하여 신자들을 어둡게 현혹시킵니다.

밖에서 들어온 오류가 있고

우리 교회지도자들이 분별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안에서 자생하는 그런 오류가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튼 교회라고 해서 마귀가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사제들을 타락시키고, 신자들을 타락시키고... 분별을 못하게 합니다.




두 번째로 지금이 환난의 시대라고 하는 징표는

성모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독성죄가 퍼지고 있다.

독성죄는 뭡니까?

거룩하게 축성된 사람, 축성된 건물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도 잘못하면은 타락할 수가 있죠.

우리의 몸뚱아리도 축성된 것입니다.

본당마다 다니면 신자들은 사제를 미워하게 마귀가 장난을 합니다.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거룩한 것을 시궁창에 빠뜨리고,

거룩하게 살아야 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사탄은 성령이 머무시는 궁전인 우리의 몸을 음란을 통해서 타락시키고

청소년들의 순결을 빼앗습니다.

순결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 요즘, 어린 아이 때부터

컴퓨터에 빠져서 이상한 사이트에 드나들면서 영적순결을

아주 어린 나이에 다 뺐깁니다.

성폭행은 몸뚱아리만 건드리는 것이 성폭행이 아니라 그런 여러 가지

나쁜 매체를 통해서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올바르고 아름다운 그 성에 대한 의식이 없어집니다.

이 나라는 사방이 다 성적 타락을 시키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

우리들은 압니다.

동서남북을 둘러봐도 아름다운 데가 없습니다.

다 타락시키는 그런 것들 뿐이죠.




세 번째로 예수님은 거짓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왔다!’

사이비 교주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빠져서 가정을 버리고 삶을 포기합니다.

사이비 교주는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신자들을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늘 겉으로 보면 예수님을 끌어들이고 성모님 끌어들입니다.

교묘하게 변장을 해서 사기극을 벌입니다.

마귀는 능력자이기 때문에 성모님의 옷을 입고 나타나고

예수님의 얼굴로도 변장을 합니다.




전통적으로 그 성모님의 메시지가 진짜냐? 아니냐?

판별하는 기준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이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일치해야합니다.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교회에 절대 순종해야합니다.

세 번째는 그 메시지의 내용이 선한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성모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이비 교주들의 출현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겁니다.

내가 오기 전에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왔다.

이쪽으로 와야만 은혜를 받는다.

이곳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외에는 사탄이다.

사이비 교주들은 이렇게 강조하면서 신자들을 현혹시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빠지지 마십시오.




각 교구마다 천주교 무당들이 몇 명씩은 다 있습니다.

본당신부 몰래 몰려갑니다.

돈 봉투 가져다 들이밀면서 무당한테 가서 뭐,뭐... 봐달라고 하듯이

‘우리 이사 갈 날짜 좀 물어봐줘 성모님한테....’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성모님이 그 놈 이사 갈 날짜를 왜 알려줘? 그놈한테.....

바빠 죽겠는데 지가 알아서 가는 거지...




네 번째 징표는 전쟁과 기아와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

한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친다 하셨으니...

석유를 빼앗기 위해서 강대국이 힘없는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탄을 물리친다는 구실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어갑니다.




다섯 번째로는 자연재해가 올 것이다!

무서운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것이다!

유엔 사무총장도 지금 지구에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서 경고를 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피부에 와 닿질 않습니다.

내 동네에 지진이 일어나면 그때야 이제 호들갑을 떨지만.....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지진에 대해서는 별로 감각이 없습니다.

지진의 공포, 토네이토, 쓰나미, 화산폭발, 기후 이상 증상등.....

과연 내 자식 대에는 온전히 사시사철 맞이하면서 살 수 있을까?

지금 이러한 현상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주님 재림하기 전에

하나의 징표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제 이런 것들이 예수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어떨 때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이 죄 속에 있을 때 잘못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오지만 비록 부족하고 늘 걸려 넘어지지만, 하느님을 향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바로 내일 온다 하더래도 절대 두렵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하느님 앞에서 죽을힘을 다해서 영적투쟁을 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온다하더라도 기쁘게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준비하면서 사는 영혼에게는 주님의 재림은 기쁨의 날이 되지

공포의 날이 되지 않을 것이요!

오늘 우리들은 그런 마음으로 오늘 이 미사가

내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이 순례가 내 생애 마지막

순례를 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하루를 머물고 내일도 그런 마음으로 머물고......

매일매일을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생활한다면......

그날이 오더라도 주님은 자비지극하신 예수님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아멘

위기는 선물이다.<성령 송가> -안젤름 그륀 신부-

Ⅳ) 위기는 선물이다. - <성령 송가>

<위기에 도움이 되는 성령 송가>

그리스도인들이 외적•내적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위기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성령 송가는 도움이 되었다.

성령 송가, “오소서, 성령님”은
1200년경 스테판 랭턴이 지었다.

알프레드 델프가 1944년
베를린 테겔 감옥에서 이 아름다운 기도문을
묵상하면서,

정리했던 사상을 깊이 음미하고
그의 해석을 우리 시대에 알맞게 소개하고 싶다.

알프레드 델프는 처음엔 뮌헨의 비밀경찰청에
구금되어 있다 1944년 9월 7일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감옥생활을 하다 베를린 테겔로, 마지막으로는
플뢰텐제로 이송되어 1945년 2월 2일 처형되었다.

알프레드 델프는 성령께 모든 희망을 두었다.
성령은 악령을 쫓아내시고, 거룩하고 치유하는 영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실 수 있다.

따라서 성령 송가에 대한
그의 묵상은 우리 시대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감옥에 갇힌 그는 늘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렸지만 성령 묵상은 희망을 더욱 북돋아 주었다.

그는 묵상을 통해
비인간적 세계에서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감옥에서 환상의 세계로 피신하는 도피가 아니라
감옥과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심문의 비참한 세계를 견뎌내기
위해 성령의 세계에 깊이 잠기는 것이었다.

“위기는 선물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눈(目)’과 ‘봄(見)’

2011.11.14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마카베오 상1,10-15.41-43.54-57.62-64 루카18,35-43





‘눈(目)’과 ‘봄(見)’



오늘은 ‘눈(目)’과 ‘봄(見)’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눈이 열리다’ ‘눈을 뜨다’ ‘눈이 멀다’ ‘눈이 가리다’

‘눈높이를 맞추다.’… 등 눈에 관련된 말은 끝이 없습니다.

역시 ‘봄(見)’에 관련된 볼 ‘견(見)’자가 들어가는 말도 많습니다.

견해(見解), 견성(見性), 선입견(先入見), 편견(偏見) 등이요,

관상(觀想), 각자(覺者)에서 보다시피

봄(見)과 깨달음(覺)이 깊은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있는 그대로, 제대로 잘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잘 봐야 올바른 판단입니다.

하여 신언서판(身言書判) 중 으뜸으로 치는 게 ‘판단(判斷)’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개의 길인 팔정도(八正道) 역시

바르게 보는 ‘정견(正見)에서 시작됩니다.

정견(正見)에 이어 정사유(正思惟;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바르게 말하기), 정업(定業;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바르게 깨어있기),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기)로 이어집니다.



저는 오늘 복음 장면이 흡사 미사장면을 압축한 듯 보였습니다.

길목에서 주님을 기다리던 눈 먼 걸인은

주님이 나타나자마자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 먼 걸인은 그대로 주님을 갈망하는 우리 구도자를 상징합니다.

우리 역시 매일 미사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주님을 만나자마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세 번씩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 기도를 바치며 미사를 시작합니다.



간절히 찾고 부를 때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문 먼 걸인의 갈망을 꿰뚫어 본,

주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에 걸인의 즉답입니다.

소원이 간절할수록 소원은 짧고 단순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진정 구도자라면 소원은 이 것 하나뿐입니다.

제대로 잘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입니다.

똑같은 눈이라도 보는 것은 다 다릅니다.

보는 이도 있고 보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탐(貪;탐욕), 진(瞋;성냄), 치(痴;어리석음)에 눈이 가려버리면

눈 뜬 장님이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본다 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마음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 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을 잃은 이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영적 삶은 부단한 ‘탈출(exodus)의 여정’이자

마음의 눈이 열려가는 '개안(開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1독서 마카베오 상권에서 우리의 현실을 묵상했습니다.

그리스의 문화, 종교, 관습과 동화되어가면서 정체성을,

민족 고유의 민족혼의 눈을 잃어가는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에 저항하여 일부는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죽어갔다 합니다.



중국에 속국이 되었다가 일본에 이어

이제는 미국의 속국이 되어 미국화 되어 감으로

우리 고유의 눈을 잃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미 간의 불평등한 FTA 조약도,

미군의 군사기지가 예정되는 강정마을의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동화되지 않고 우리로 살아남기 위해

지도자들은 물론

국민들의 각성과 지혜로운 안목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나라는 물론 개인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 현실에 세뇌되어 속화(俗化)되다보면

마음도 무뎌져 마음의 눈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깨어 제대로 보고 살 수 있도록 규칙적이고 항구한 영성훈련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걸인은 다시 보게 되어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 살라고 있는 우리의 눈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의 길목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어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따라 새롭게 하루를 살게 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빛의 자녀들

2011.11.13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잠언31,10-13.19-20.30-31 1테살5,1-6 마태25,14-30





빛의 자녀들



함께 해도 단풍잎들 다 떨어진 나무들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11월입니다.

바로 이 때 자문, 자답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믿는 이들 누구나 물어야 할 아주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수도자는 무엇인가?’매일 묻는 자가 수도자란 말도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답은 단 하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요,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여기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며 방향이라는,

한 마디로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빠지면 그야말로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허무 그 자체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빛의 자녀들입니다.

오늘은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빛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말씀 묵상 중 지혜서의 다음 대목 중

‘경외(敬畏)’라는 말이 참 반가웠습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더불어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났습니다.

‘부부간의 열정은 잠시고 신뢰만이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우아함도, 아름다움도 잠시지만 하느님 경외는, 하느님 신뢰는 영원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지혜요 단순한 삶입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좌우명도 위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이었습니다.



오늘 집회서의 주님을 경외하며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여인은 과연 경천애인의 모범입니다.



오늘날 불행과 혼란은 하늘을, 하느님 경외를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경외와 연관되어 떠오른

다음 ‘경(敬)’자가 들어간 말들 경천, 경애, 공경, 경건, 존경입니다.

모두 하느님 경외에 원천을 두고 있는 말들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함양되는

공경(恭敬), 경애(敬愛), 경건(敬虔), 존경(尊敬)의 마음 자세입니다.

이런 ‘경(敬)’을 잃은 사회는 결코 평화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 교육 역시

하느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도 참 적절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너는 네 손으로 벌어먹으리니,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축복에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경외에 기초하지 않은 행복은

위태롭기가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둘째,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 저절로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삶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영성생활의 궁극목표는 깨어있는 삶에 있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영혼이 환히 깨어있는 시간은 하루 중 얼마나 될까요?

제 정신을 잃고 사는 시간도 꽤 많을 것입니다.

깨어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에 머물러 사는 이도 있고

미래의 두려움을 앞당겨 사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도

결국은 지금 여기 계신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삶을 목표로 합니다.



깨어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있음은 빛입니다.

깨어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있음은 찬미입니다.

깨어있음은 감사입니다.

하여 깨어있는 영혼들은

끊임없이 기쁨 중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빛나는 깨어있음에 사라지는 어둠이요 치유되는 몸과 마음입니다.

환히 빛으로 깨어있을 때 나쁜 생각의 유혹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영혼이 잠들어 있을 때

도둑처럼 들어오는 탐진치(貪瞋痴)의 어둠의 유혹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늘 깨어 살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깨어있는 우리들은 그대로 빛의 자녀이자 대낮의 자녀입니다.

밤이나 어둠에 속한 우리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올지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죽음 앞에서 늘 환히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깨어있는 삶이 아름답고 빛납니다.

그러니 다름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살도록 합시다.

하느님을 경외할수록 맑고 또렷한 깨어있는 영혼입니다.



셋째, 하느님께서 주신 탤런트를 잘 활용하는 삶입니다.



누구나 하느님께 받은 탤런트입니다.

깨어있을 때 발견되는 하느님께 받은 내 탤런트입니다.

우열을, 호오를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선물입니다.



서로 경쟁하라 주어진 은사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라 주어진 은사입니다.

각자가 꼭 필요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정신이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어 내 받은 은사의 선물을 몰라

억울하고 안타깝게 질투와 시기로 낭비되는 정력과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상대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절대평가하십니다.

각자 받은 탤런트에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100점입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니라 각자 노력의 충실도를 보십니다.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의 자세를 보십니다.



다섯 탤런트를 받았다가 다섯 탤런트를 남긴 이나,

두 탤런트를 받았다가 두 탤런트를 남긴 이나

똑같이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제 받은 능력에 최선을 다했을 때 해피엔딩 인생입니다.

문제는 한 탤런트 받은 자의 반응입니다.

한 탤런트 받아서 꼭 숨겨두었다가

그대로 바친 이의 하느님관이 참 안타깝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 자기가 자초한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 탓 추호도 할 수 없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탤런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완전히 하느님에 대한 오해요 착각이었습니다.

진정 하느님의 너그러우심과 자비하심을 알았더라면

한 탤런트를 이렇게 방치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활용해 한 탤런트를 남겼을 것입니다.



이런 탤런트의 방치는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무시요 모욕입니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맞갖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우리 모두 내 받은 은사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빛의 자녀로 살고 싶습니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깨어 사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하느님을 경외할 때 깨어 살게 되고 자신이 선사 받은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며 살 수 있습니다.

.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받은 은사를 최대한 잘 활용한 우리를 향해 칭찬하시며

당신 잔치의 기쁨을 맘껏 누리게 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아멘.

♣ 우리가 겸손해야하는 이유

♣ 우리가 겸손해야하는 이유

겸손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기 인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겸손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너의 모든 겸손은 너 자신을 아는데 있다.”

우리의 겸손은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 낮추신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
그분의 겸손을 모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완전히 하느님께 의존하며,
하느님 손에 달려있는 존재다.

겸손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경험한 인간이 하느님께 대하여 가지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자세이다.

이 제한성은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겸손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에서 나온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루가 14,11)

참고한 글 “아래로부터의 영성”
Anselm Gruen 신부.

♡ 기쁨을 드리는 것 ♡

저는 이제 진실이 아니거나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커다란 축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허영이며 거짓입니다.
세속적 지혜를 넘어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달라고 청하며
진리 안에서 살려는 소망을 가지면
이겨내지 못할 어려움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하는 30일묵상(양장)」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