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근 신부님 ===10/1/2026===친구인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우리는 비워집니다
<친구인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우리는 비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통해서 ‘빛이신 예수님’이 선포됩니다.
그가 자신을 증언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한 것은 그 자신을 비운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절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상대에게로 건너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그토록 자신을 비울 수 있게 하였을까요?
자신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지 않고 상대를 향하여 있었던 까닭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는 한은 결코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신랑을 향하여 있을 때라야 신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가 친구입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요한 3,29)
그렇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친구를 향한 까닭입니다.
친구인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우리는 비워집니다.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친구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떠나와 우리를 ‘친구’(요한 15,15)라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갈 때라야 그분을 ‘친구’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 바람에 자신에게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향하여’ 희망을 두고 있는가?
오늘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랑’과 ‘신부’의 성경적 표상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상합니다(예레미아, 에제키엘, 호세아).
그리고 초대 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또한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자의 영혼과의 사랑을 아름답게 비유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냅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지만,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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